(44)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파탄나고, 나대용은 강진현감에서 파직되다.
- 작성일
- 2022.11.0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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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44회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파탄나고, 나대용은 강진현감에서 파직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1595년과 1596년은 명나라와 일본사이에 강화협상을 하여 휴전중이었다. 이 시기에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전선 증강과 무기 확충, 수군 훈련에 매진했다.
그런데 1596년 9월에 명나라와 일본 간에 4년간의 강화교섭이 완전히 깨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황제가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명나라 황제의 국서를 보고 분노했다.
1593년 3월부터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강화 협상을 하였다. 명나라는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일본에게 알렸다. 명나라는 일본이 중화 질서 속에 들어오면 감격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1593년 5월에 나고야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1) 명나라 황제의 딸을 일본 국왕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명나라와 일본사이의 감합무역을 재개한다. (3) 명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 (4) 조선 팔도 중 4개도를 일본에게 항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낸다. (6) 일본은 포로가 된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 보낸다. (7) 조선은 일본에 항복을 서약한다
이런 히데요시의 요구는 명나라나 조선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함에도 일본의 고니시와 명나라의 심유경은 명나라와 일본 양측에 서로 숨기고 강화협상을 진행하였다.
한편 고니시는 심유경과 짜고 그의 가신인 나이토 죠안을 가짜 항복 사절로 내세워 명나라 황제에게 보냈다. 1594년 12월 7일에 나이토 일행은 북경에 도착하여 14일에 황제를 알현하였다.
명나라 병부는 나이토에게 세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1)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 (2) 히데요시를 일본 왕으로 봉하는 것 외에 별도의 요구는 하지 말 것 (3) 일본은 조선과 우호 조약을 맺고 침범을 하지 말 것
이러자 나이토는 이를 준수하겠다고 서약했다. 1594년 12월 30일에 명 황제는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봉하는 책봉사로 정사에 이종성, 부사에 양방형을 임명했다.
1595년 1월 30일에 책봉사 일행은 북경을 출발하여 4월 27일에 서울에 도착했고, 11월 말에 부산포 일본군 진영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1596년 3월부터 “히데요시는 명 황제의 책봉을 받으려는 의지가 없고, 책봉사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붙잡아 가두어 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부산포 일대에 나돈 것이다. 이에 놀란 명나라 정사 이종성은 4월 3일 한밤중에 인장·관복·수행인 등을 버리고 변장하여 일본군 진영에서 도망쳤다.
이러자 명나라는 5월에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6월 12일에 명나라 부사 심유경은 먼저 오사카에 도착하여 6월 27일에는 후시미성에서 히데요시를 배알하였다. 정사 양방형은 6월 중순에 일본에 들어갔고, 8월 18일에 명나라 사신 수행원 자격으로 정사 황신, 부사 박홍장이 부사도 일본에 도착했다. 1)
9월 1일에 명나라 사절단과 황신 일행이 오사카성에 도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에서 자신이 요구한 강화조건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명나라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9월 2일에 사건이 터졌다. 고니시와 심유경은 서로 짜고 조약담당관인 승려 세이쇼 쇼타이에게 국서를 조작하여 적당히 읽도록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자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심유경으로부터 국서를 전달받은 히데요시는 쇼타이에게 국서를 읽어보라고 하자, 쇼타이는 진땀을 흘리면서 벌벌 떨기 시작하였다. 히데요시가 이를 추궁하자 쇼타이는 사실 그대로 국서를 읽고 말았다. 일본이 제시한 강화 7개 요구 조건이 모조리 무시되었음을 안 도요토미히데요시는 격분하였다. 그는 책봉문을 빼앗아 내팽개치며 외쳤다.
“아니 일본 왕이야 이미 내가 하고 있는 데, 무슨 명나라 오랑캐의 책봉이냐? 게다가 나의 요구조건은 하나도 안 들어주고.”
히데요시는 먼저 명나라 사신을 죽이겠다고 덤벼들었다. 이러자 세 명의 원로들이 “예로부터 사신을 죽이는 나라는 없었다.”고 극력 말려서 명나라 사신들은 죽음을 면했다.
이어서 히데요시의 분노는 자기를 속인 고니시에게 날아갔다. 그는 고니시를 당장 죽이라고 소리쳤다. 다시 원로와 왜장들이 간청하였다. 고니시 만큼 조선 사정에 밝은 장수가 없으니 공을 세울 기회를 주라고 빌었다. 히데요시는 고니시의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들은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일본을 빠져나왔다.
통역관 요시라는 조선의 황신에게 이번에 왜군이 조선을 쳐들어가면 전라도 쪽으로 진격할 것이 틀림없다고 일러주었다. 11월 23일에 부산에 도착한 황신은 곧장 그간의 사정을 아는 대로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리하여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심유경 사이에 벌인 4년간의 국제 사기극은 막을 내렸다. 심유경은 또 명나라에 거짓 보고하였으나 명나라는 이번에는 속지 않았다. 명나라 황제는 지금까지 강화를 추진해온 관계자들을 모두 처벌했다. 병부상서 석성이 실각되었고 심유경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1597년 7월에 부총병 양원은 경상도 의령에서 심유경을 잡았다. 그는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짐승 가죽을 말에 싣는 중이었다. 그는 명나라로 끌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 강진현감 나대용, 파직 당하다.
1596년 10월 11일에 선조는 강진현감 나대용을 파직시켰다. 1596년 10월 11일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 사헌부 장령 윤형이【집의 김시헌, 장령 유사원, 지평 이형욱·김대래 】 와서 아뢰었다.
"작상(爵賞)은 공로를 보답하기 위한 것인데 이를 함부로 베풀면 공로가 있는 사람이 맥이 풀릴 뿐만 아니라 요행을 바라는 문을 열어주기에 안성마춤입니다. 근래 군공(軍功)이 있다고 함부로 거짓말하여 벼슬을 받기도 하고 혹은 연줄을 타고 상을 얻기도 하는 자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보고 듣는 자로서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수산군(守山君) 이지(李智)는 난리 초에 한갓 종군(從軍)을 자원했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히 당상(堂上)의 가자(加資)를 받은 것만도 이미 분수에 넘친 것인데, 그 뒤에 조그마한 공도 전혀 없으면서 없는 사실을 그럴싸하게 꾸며 각처의 수신(帥臣)들에게 올림으로써 후일에 포상을 받을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 마음 쓰는 것을 살펴보건대 지극히 형편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그 아들을 시켜 외람되게 상소하여 2품(品)의 높은 지위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매우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개정을 명하소서.
비변사는 지(智)가 공로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말을 따라 주어 함부로 상가(賞加)를 청함으로써 공로를 보답하는 중한 법으로 하여금 공없는 사람에게 마구 베풀어지게 하였으니, 그 사사로운 정분을 따라 마음쓴 실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유사 당상도 아울러 추고하게 하소서.
강진현감 나대용은 사람됨이 간교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매우 주제넘으며, 술과 떡 같은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명성을 구하고 남의 말[馬]을 약탈하여 뇌물로 썼습니다. 그리고 사신이 바다를 건널 때에는 수호용 선박을 배정하는 것이 전례인데 보내지 않았으니, 형편없이 관직을 수행하며 사명(使命)을 멸시한 죄가 큽니다. 청컨대 파직을 명하소서.
(康津縣監羅大用, 爲人巧詐, 處事泛濫, 造作酒餠, 以干民譽, 掠奪人馬, 以資賄物。 且於使臣越海之時, 例定守護船隻, 而不爲起送, 其居官無狀, 蔑待使命之罪大矣。 請命罷職)”
이러자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 수산군은 그와 같이 논할 것이 아니다."
라고 답했다.
선조의 조치는 참 차별적이다. 왕족은 비호하고 나대용은 파직시키다니.
다행히도 나대용은 파직된 후 몇 달 지나지 않은 1597년에 금구현령(종5품)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6품에서 종5품으로 승진까지 하여 1598년 8월까지 근무하였다.
주1) 조선은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협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