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나대용, 외교활동을 하다.
- 작성일
- 2022.10.2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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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9회 나대용, 외교활동을 하다.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3년 5월 2일에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에서 4월 17일에 작성되어 선전관 이춘영이 가져온 선조의 유서(諭書)를 받았다.
“지금 접반사 이덕형이 올린 장계를 보니 경상좌감사 한효순의 보고하기를 ‘부산과 동래 사이에 왜선이 많이 와 닿고 있어서 현재 군사가 자꾸 늘어나는 형편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극히 염려스러운바, 그대는 수군을 정비하여 오는 배를 쳐부수어 깨뜨리고 멋대로 상륙하지 못하게 하라.”
5월 3일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본영에 왔다.
5월 7일에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6차 출전하였다. 전라좌수군은 전선 42척, 사후소선(伺候小船) 52척, 전라우수군은 전선 54척, 사후소선 54척으로 모두 202척 이었다.
특히 5월 7일은 1592년 이 날에 옥포에서 첫 해전을 한 날이어서, 이순신은 출전의 감회가 남달랐다. 7일에 이순신과 이억기는 미조항(남해군 삼동면)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8일에는 당포에 머물렀고 9일에는 걸망포(통영시 용남면)에서 묵었는데 경상우수사 원균이 2척을 거느리고 합류하였다. 1)
10일에 조선 연합함대는 일찍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선전관 고세충이 가지고 온 유서(諭書)를 받았다.
“접반사 윤근수의 장계에 의하면 왜군들이 전선과 수군들을 전부 집결시켜 부산 앞 바다 어귀에 가지런히 정렬하였다 하니, 경솔하게 움직이지는 말고 명나라 경략(송응창)의 지시를 기다려서 힘을 합해 무찌름으로써 나라의 치욕을 씻도록 하라.”
이로써 수군은 명나라 제독의 허락없이 주도적으로 왜적을 치는 것에 제동이 걸렸다.
한편 선조의 유서를 받은 이순신은 부산 공격의 위험성, 수륙합동공격의 필요성과 수군 증강을 위해 충청도 수군의 합류를 조정에 요청했다.
11일에 이순신은 견내량을 중심으로 멀리 파견했던 정찰병의 보고를 받았다.
“가덕도 바깥 바다에 왜선 200여척이 머물고 있으며, 웅천은 전일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출전하지 않았다.
12일에 본영의 탐후선(探候船)이 들어왔는데 그 편에 순찰사의 공문과 명나라 시랑의 패문이 왔다. 이 날 이순신은 새로 만든 정철 총통을 비변사에 보냈다. 정철 총통은 정사준이 만든 신무기였다.
5월 14일에 이순신은 거제도 견내량 바다 가운데 있었다. 선전관 박진종이 선조의 유서를 가지고 왔고, 동시에 선전관 영산군 복윤고 유서(諭書)를 가지고 왔다.
이순신은 박진종의 유서를 받았다는 장계를 올리면서 충청도 수군의 지원을 거듭 요청했다.
“ (...) 웅천의 적들이 여전히 웅거하여 배를 으슥한 곳에 감추고 있고, 양쪽의 산협이 바다 어귀를 눌러 지세가 좁고 물이 얕아서 판옥대선은 마음대로 출입하면서 적을 쳐서 깨뜨릴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원 ·김해 ·양산의 적들도 꼼짝하지 않은 채 감추어 놓았던 수 많은 배를 가덕도 앞바다로 내어다 진을 치고 웅천의 왜적과 함께 남북으로 나뉘어 파수 보며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적들의 소굴을 버려두고서는 부산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 창원·웅천·김해 등지에 웅거하여 길목을 누르고 있던 적의 형세가 지금에는 더욱 강해졌으므로 육군의 지원 없이 수군만으로 적을 끌어내기는 더욱 어렵기로 매우 걱정스러워 도원수(김명원)와 체찰사(류성룡) 및 전라도 순찰사(권율)에게 이미 공문을 내었거니와 ... 당장에 대적을 막으려면 군세가 전보다 더 약하오니 충청도 수군을 빨리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p 128-129)
또한 선전관 영산군 복윤이 받들고 온 유서를 받았다는 장계도 올렸다.
“지금 송경략(시랑 송응창)이 보내온 공문을 보니 ‘ 비록 왜적이 도성에서 물러 나갔지만 두 왕자와 배신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처럼 왜적들이 우리의 호령을 어기므로 이여송과 이여백·장세작에게 명령하여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도록 하였다. 또 급히 경상도와 전라도에도 호령을 내려 수군과 육군을 정돈하게 하고 모든 전선들은 부산과 동래의 각 진을 둘러나와 각각 차례로 정박하여 그 배의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였으니 그대는 그 공문에 적힌 사실에 의거하여 병선을 정비하고 기회를 보아 왜적을 무찔러 죽이도록 하라”
그런데 이순신은 선전관들에게서 피난 간 선조 임금의 사정과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5월 17일에 영남 우수사가 군관을 보내왔다. 가져온 진주의 급보를 보니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지금 충주에 머무르고 있고 왜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 치고 있다 하였다. 이순신은 분통했다.
이후 이순신은 왜적의 동향을 계속 주시 하였다.
5월21일 새벽에 조선함대는 10여일 머무르던 견내량을 떠나 유자도로 진을 옮겼다. 오후에 정찰병이 적의 출몰이 여전하다고 이순신에게 보고했다.
5월 22일 아침 늦게 나대용이 본영(전라좌수영 여수)에서 왔는데 명나라 송시랑(경략 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다. 송시랑이 보낸 관원이 본도 도사, 행상호군, 선전관 한 사람과 같이 온다는 통지문을 가지고 왔다. 송시랑의 관원은 우리 배를 살펴보는 일로 왔다고 한다. 곧 우후에게 영접하도록 내보냈다. 오후에 칠천량으로 옮겨 배를 대고, 접대의 예를 문의할 일로 나대용을 내보냈다. 저녁에 방답첨사가 와서 명나라 사람 접대하는 일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비가 하루 내내 왔다.
이를 보건대 나대용은 5월 7일에 이순신과 함께 제6차 출전하지 않고 전라좌수영 본영에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대용은 전라좌수영 본영과 경상도 진영을 오가며 전령 역할을 수행한 듯 하다.
23일에 이순신은 전라병사 선거이의 편지 및 공문을 받았다.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저녁에 아들 회가 와서 명나라 관원이 본영에서 배를 타고 올 것이라고 전했다.
5월 24일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아침에 진을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옮겼다. 나대용이 사량 (통영시 원량면 양지리) 뒷 바다에서 명나라 관원을 발견하고 먼저 와서, 명나라 관원과 통사(통역관) 표헌(表憲)과 선전관 목광흠이 같이 온다고 전하였다.
오후 2시경에 명나라 관원 양보(楊甫)가 진 앞에 당도하였다. 우별도장 이설을 마중 보내어 배까지 데려왔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이순신은 이들을 지휘선에 오르기를 청하여 명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고 마주 앉기를 청하니, 굳이 사양하면서 앉지 않고 선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 하며 수군의 강성함을 매우 칭찬하는 것이었다. 예물단자를 바치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 하다가 받고는 무척 기뻐하면서 재삼 고맙다고 하였다.
이 자리에 나대용도 참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대용이 명나라 관원 접대 일을 하였으니 아마 참석하였으리라.
25일에 명나라 관원과 선전관은 술이 많이 취하여 덜 깬 듯 하였다. 이순신은 아침에 통역관 표헌을 불러 와서 명나라 장수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표헌은 명나라 장수의 속뜻은 알 수 없으나,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 한다고 하였다.
송시랑이 우리 수군의 허실을 알아보려고 그가 거느리는 부하 가운데 정탐의 일을 맡은 양보((楊甫)를 보낸 것인데, 수군의 위세가 이렇게 대단하니 기쁘기 그지 없다고 하였다 한다. 늦게 명나라 관원은 본영으로 돌아갔다.
초저녁이 지나서 경상도에서 온 명나라 사람 2명, 경상우도 관찰사의 영리 1명, 접반사 군관 1명이 진문에 도착하였으나, 밤이 깊어 들이지 않았다.
5월 26일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보니 절강의 포수 왕경득이라고 하였다.
글자는 조금 알아서 한참 동안 대화했으나 알아듣지 못하여 매우 한탄스러웠다. 이처럼 명나라 관원들이 여러 명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이 날 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사나운 바람까지 불어 함선이 파도에 요동을 치며 서로 부딪쳐 부서지기도 했다.
5월 27일
연합함대는 비와 바람 때문에 유자도로 이동하여 진을 쳤다. 협선 3척이 간 곳이 없더니 늦게야 돌아왔다.
이 날 이순신은 선거이의 편지를 받았다.
“오늘 창원의 적들을 토벌하려고 했는데 궂은 비가 개지 않아 나아가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선전관 이춘영이 전라좌수영에서 조정에 보고한 영남 왜적의 동향을 살펴보자.
1593년 5월 22일자 ‘선조실록’에 나와 있다.
“선전관 이춘영이 전라도 좌수영에서 와서 아뢰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경상우도의 감사 김성일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경상우병사 김면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후략)."
6월 1일에 기다리던 충청수군이 도착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삼도수군 연합함대가 된 것이다. 나대용도 본영에서 왔다.
6월 1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아침에 탐후선(探候船)이 들어왔다. 어머니 편지도 왔는데 평안하시다니 매우 다행스럽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도 함께 왔다.
그 편지에 적혀있기를 ‘명나라 관원 양보가 왜인의 물건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모르더니 말 안장 하나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탐후선이 왜인의 물건을 가지고 왔다. 충청수사 정걸이 왔다. 나대용, 김인문, 방응원과 조카 봉도 왔는데 어머님이 평안하시다고 한다. 매우 다행스러웠다. ”
6월 2일
본영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군관 송두남·이경조· 정사립 등이 판옥선을 끌고 본영으로 돌아갔다.
6월 8일
탐후선이 왔다. 나대용이 병이 나서 본영(전라좌수영 여수)으로 돌아갔다. 2) 그런데 임병원이 1860년에 지은 나대용 ‘행장(行狀)’에는 “이때 이순신은 손수 약을 마련하여 주면서 ‘아무쪼록 빨리 회복하여 군무를 비워둠이 없게 하라’하였으니 그 친절과 신임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p 95)라고 적혀 있다. 3)
주1) 6차 출전 때 전선(판옥선)은 전라좌수군 42척, 전라우수군 54척, 경상우수군 2척으로 모두 98척이었다. 이는 2월 10일의 제5차 출전의 전선 89척(전라좌수군 42척, 전라 우수군 40척, 경상우수군 7척)보다 9척이 늘었다. 이를 자세히 보면 전라우수군은 14척이 늘었고, 경상우수군은 5척이 줄었으며 전라좌수군은 변동이 없었다. 경상우수군의 전선이 5차 출전의 7척에서 6차 출전은 2척으로, 5척이나 줄어든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주2) 나대용은 6월 1일에 탐후선을 타고 전라좌수영 본영(여수)에서 와서 6월 8일에 병으로 본영으로 돌아갔다.
주3) 이순신이 나대용에게 약을 지어 주었다는 ‘행장’의 출처는 확인할 길이 없다.
( 참고문헌 )
o 김태훈 지음,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2권, 비봉출판사, 2006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2010
o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 옮김,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o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조성도, 충무공 이순신, 연경문화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