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50일간 휴전과 진주대첩
- 작성일
- 2022.10.2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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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4회 50일간 휴전과 진주대첩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심유경과 고니시, 50일간 휴전 협정을 맺다.
이순신이 부산포에서 승첩하던 9월 1일에 평양에서는 명나라 유격 심유경과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가 회담하여 50일간 휴전하기로 했다.
심유경은 본래 절강성 가흥 출신 장사꾼으로 일본에 자주 드나들어 왜국의 실정에 익숙하였으므로 병부상서 석성이 경영첨주유격(京營添住遊擊)이라는 직책을 주어 적정(賊情)을 탐지하게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9월 1일 ) 그런데 기타지마 만지는 심유경을 ‘거리의 무뢰한’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기타지마 만지, p 121 )
8월 중순에 심유경이 의주에 유숙하자 조정은 직제학 오억령을 보내 문안하였다. 심유경은 오억령에게 말했다.
"내가 왜적의 내부로 들어가 의리로써 그들을 꾸짖기를 ‘조선은 예의지방(禮義之邦)으로서 본시 죄과가 없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감히 명분도 없이 병사를 출동시켜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죄 없는 백성들을 살육하는가.’ 할 것이다. 왜적이 만약 듣지 않으면 또 ‘조선은 중국과 순치(脣齒)와 같은 나라이므로 너희들이 만약 철병하지 않으면 비단 산동(山東)의 병사들만 다 출동시킬 뿐 아니라 천하의 병사들을 다 징발하여 너희들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여 기어이 물리치겠다.’고 하겠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9일)
8월 17일에 심유경은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은냥을 가지고 선조를 만났다.
이 날의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심유격과 낭비어(郞備禦) 등 3인이 황제가 하사하는 은냥(銀兩)을 가지고 왔다. 선조의 대가(大駕)가 의주의 서문 밖에 나가서 지영(祗迎)하고, 용만관(龍灣館) 대청 앞으로 와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막차(幕次)에 나아가 옷을 바꾸어 입고 접견하였다.
선조 : "황은(皇恩)이 망극합니다."
심유경 : "성상께서는 귀국이 지성으로 사대(事大)한 까닭에 병마 70만을 이미 조발(調發)하게 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곧 올 것입니다."
선조 : "먼저 온 6∼7천명으로도 이 왜적을 초멸할 수 있소이다. 그러나 지체한다면 대군이 모인다 하더라도 미치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심유경 : "오는 20일에 직접 평양에 직접 가서 왜적의 형편을 탐지해 본 뒤에 거사하려 합니다."
선조는 빨리 진격하여 왜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것을 거듭 청했다.
이에 심유경이 말했다.
"귀국은 예의(禮義)의 나라인지라 병법을 모르기 때문에 이같이 강청(强請)하는 것입니다. 대저 용병의 도는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선조가 말했다.
"오늘의 청은 전승(全勝)을 바라서가 아닙니다. 왜적으로 하여금 천병(天兵)이 와서 구원함을 알게 하여 그들이 감히 서쪽으로 향할 계책을 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왕 참장(王參將)은 실제로 우리 나라의 정상을 잘 알고 있소이다. 노야(老爺)는 만나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어서 심유경이 말했다.
"용병의 도는 위로는 천문을 살피고, 가운데로는 지리를 살피고, 아래로는 인사를 살펴야 합니다. 전일의 싸움에서는 이를 살피지 않았다가 패배한 것입니다. 황상(皇上)께서 이 소식을 듣고서 진노하였습니다. 군사 70만을 일으킨 것은 귀국을 회복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일본의 소굴을 탕복(蕩覆)하고자 함입니다."
선조가 말했다.
"대인(大人)께서는 이미 성지(聖旨)를 받들었으니 속히 나아가 초멸(勦滅)시켜주기 바라오.“
심유경을 만난 다음 날인 8월18일에 선조가 전교하였다.
"심 유격의 말은 믿기가 어려울 듯하다. 주청사를 보낼 일을 비변사에 일러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이러자 비변사가 회계하였다.
"심 유격이 말한 것은 앞뒤가 같지 아니하여 그대로 다 믿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군기(軍機)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므로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진주사를 보내야 한다는 성교(聖敎)가 지당합니다."
(선조실록 1592년 8월 18일)
한편 9월 1일에 심유경은 고니시를 평양에서 회담하였다.
고니시가 심유경에게 일본이 출병한 이유는 명나라에 봉공(封貢)하려는 것이라고 말하자, 심유경은 "이곳은 바로 중국 조정의 지방이니 그대들은 물러나 주둔하면서 중국 조정의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고니시가 지도(地圖)를 보이면서 “이곳은 분명히 조선 지역이다.”라고 말하자, 심유경은 "평상시에 여기서 조서(詔書)를 영접하는 까닭에 많은 궁실(宮室)들이 있다. 비록 여기가 조선 지역이라 하더라도 바로 중국의 지경이니 여기에 머물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윽고 고니시는 대동강 이남의 땅은 일본 영역이라고 다시 주장하면서, 봉공 요구는 황제의 허가가 필요하다하니, 심유경이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기간 50일간 휴전하겠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50일간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 왜군의 무리가 평양의 서북쪽 10리 밖을 나오지 못하고 조선의 군사도 10리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금표(禁標)를 세웠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9월 1일, 기타지마 만지, p 122-123)
한편 9월 초에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설번은 왜군들이 간사하고 교활하다고 복명했다.
“평양을 함락시키던 날에는 ‘길을 빌어 원수를 갚으려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길을 빌어서 조공(朝貢)하려 한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중국과 서로 겨룰 수 없는 것을 천고의 한으로 여기다가 또 심유경을 만나서는 조공을 통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거만하게 매도하는 말을 하다가 순식간에 공손한 말을 하는 그들의 간사함은 믿을 수 없습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9월 1일)
# 진주대첩
1592년 10월초에 진주목사 김시민(1554~1592)이 진주성을 지켰다.
8월에 하세가와 히데카츠가 이끄는 1만2천 명의 왜군은 서울에서 김해로 남하했다. 9월 24일부터 왜군은 남해 연안을 따라 진주성 공략에 나섰다. 진주성을 점령해 경상도를 장악하고 전라도에서 겨울나기 식량을 확보한다는 작전이었다. 이 때 군사는 2만 명으로 불어났다.
10월 1일에 왜군은 함안군을 분탕질하고 곧 부다현을 넘어오다 조선군과 마주쳤다. 이윽고 왜군은 진주 소촌역에 진군했고 3일엔 말띠고개와 미륵벼루를 넘어 부대를 2개로 나누어 진주성을 공격했다. 진주성 싸움의 서막이었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성안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한편 염초를 구워 화약 150근을 마련하고 총통 170자루를 제조해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군사들도 모집했다. 유생 300명이 진주성을 지키겠다고 지원하는 등 모집된 군사가 3천명이었다. 김시민은 이순신 장군처럼 ‘준비된 장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1)
왜적이 쳐들어오자 산음의 지휘부에 머물던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은 김시민에게 전령을 보내 결사 항전을 지시했다. 아울러 김성일은 나주목사를 한 인연을 살려 호남에 의병을 요청했다. 호남과 진주는 입술과 이빨의 관계로서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도 무너진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곽재우·김준민 등 경상우도 의병장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자 최경회와 임계영, 곽재우· 김준민 등이 진주로 달려왔다.
그러면 조선과 일본의 군사 규모를 살펴보자. 조선군은 진주목사 김시민과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의 지휘하에 성안에는 3,800여명의 군인과 약 2만 명의 백성이 있었다. 성 밖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의병들이 4천명 정도였다. 진주성을 중심으로 북면에는 심대승, 서북면에는 최경회·임계영·김준민, 서면에는 정기룡과 조경형이, 남강에는 하경해, 남면에는 정유경·이달·최강·조응도 부대가 활동했다.
왜군은 가토 미치야스, 나가오카 타다오키, 하세가와 히데카츠, 기무라 시게지 등이 지휘하는 약 2만 명의 군사가 진주성을 공격했다. 어느 기록들은 왜군이 3만 명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면 10월 5일부터 10월 10일까지 6일간의 진주성 싸움을 자세히 살펴보자.
10월 5일에 왜군이 진주성 동쪽에 진을 쳤다. 김시민은 남녀노소에게 군복을 입혀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 전술을 펼쳤다.
6일에 왜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김시민은 동요하지 않고 대응했다. 저녁에 조선군은 외곽에 횃불을 올렸다. 곽재우의 부장 심대승이 의병 2백여명을 이끌고 향교 뒷산에서 불을 지폈고, 고성 의병장 최강과 이달도 달려와 협공 작전을 폈다.
7일에도 왜군은 공격했으나 성은 견고했다. 밤에 왜군은 아이들을 시켜 ‘빨리 항복하라’고 외치도록 했다. 이러자 김시민도 악공을 시켜 피리를 구슬프게 불게 해 심리전을 폈다.
8일에 왜군이 대나무 사다리로 성으로 기어오르며 공격해 왔다. 김시민은 현자총통을 쏘아 사다리를 파괴하고 진천뢰 등으로 왜적을 막았다. 이날 밤 고성의 조응도와 진주의 정유경이 군사 5백명을 각각 이끌고 외곽에 진을 쳤다. 성안에 화살이 떨어지자 김성일은 하경해를 시켜 화살을 보급하도록 했다.
9일에 김준민이 단성의 왜군 2천여명을 격퇴했다.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와 전라좌의병장 임계영도 구원병 2천명을 거느리고 왜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왜적은 조선 의병의 외곽 지원이 많아지자 내심 당황했다.
이날 밤 도망쳐 나온 한 아이가 내일 새벽에 왜군이 총공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알렸다. 성안 군사들은 결사 항전을 다짐했다.
10일은 결전의 날이었다. 밤 1시에 왜군은 후퇴하는 척하다가 2시가 되자 1만명이 동문에 쳐들어왔다. 나머지 1만 명 왜군은 북문을 공격했다. 이러자 군인들은 물론 성안의 백성들 모두가 합세해 돌을 던지고 끓은 물을 붓는 등 사투했다. 새벽 동틀 무렵에 왜군의 공세가 느슨해졌다. 이때 숨어있던 왜군의 총탄이 김시민의 이마를 관통했다. 이러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나서서 적을 막아냈다. 날이 밝자 왜군은 퇴각했다.
마침내 6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끝났다. 하지만 김시민은 상처가 깊어 한 달 후에 죽었다. 조정은 그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선무공신 2등과 충무공 시호를 봉했다.
주1) 1592년 7월에 김시민은 왜군을 섬멸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사천현감 정득열 등과 함께 사천·고성·진해의 왜적을 무찔러 여러 고을을 수복했다. 특히 진해 전투에서는 왜군 적장 다하라(平小泰)를 사로잡아 기세를 올렸다. 7월 26일에 조정은 김시민의 공로를 인정해 그를 진주목사로 임명한다. 종5품에서 5단계를 뛰어넘어 정3품 목사가 됐다.
(참고문헌)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