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안골포 해전(安骨浦海戰)
- 작성일
- 2022.10.0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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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28회 안골포 해전(安骨浦海戰)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7월 9일에 한산 해전에서 대승한 이순신은 7월 9일에 가덕으로 향하려는데 안골포에 왜선 40여척이 머무르고 있다는 탐망군의 보고에 따라 즉시 전라우수사 및 경상우수사와 함께 적을 토멸할 계첵을 상의하였다. 그런데 날이 이미 저물고 역풍이 크게 일어나 싸울 수 없어 거제 땅 온천도(거제시 장목면 칠천도)에서 밤을 지샜다.
10일 새벽에 배를 띄워 전라우수사는 안골포 바깥 바다의 가덕 변두리에 진치고 있다가 만약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오라고 약속하고, 이순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학익진을 형성하여 먼저 진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보니 왜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모두 42척이 머물고 있었다. 1)
그중에 3층으로 방이 마련된 대선 1척과 2층으로 된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있었으며, 그 나머지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있었다.
즉 어린진(魚鱗陳)을 쳤다.
그런데 포구의 지세가 좁고 얕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가 드러날 것이므로 판옥선과 같은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일본 전선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일본 수군은 형세가 궁해지면 육지에 오르려는 계획으로 험한 곳에 의거하여 배를 매어 둔채 겁내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서로 교대로 출입하면서 천자·지자·현자 총통을 마구 쏘고 장편전(長片箭) 등을 빗발치듯 퍼부었다. 2) 이때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복병을 둔 뒤 급히 달려와서 협공하니 군세가 더욱 강해져서 방이 있는 왜군 대선과 2층 대선을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다 사상하였다.
그런데 왜군들은 사상자를 소선으로 실어내고 다른 배의 왜군들을 층각대선으로 모아들이며 총력전을 펼쳤으나, 조선 연합함대가 종일토록 왜선들을 거의 다 깨뜨리자, 일부 살아남은 왜군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도망쳤다.
이순신은 도망치는 적들을 끝까지 몰아치지 않고 안골포 포구 1리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다. 막다른 골목에 있는 왜군을 궁지로 몬다면 왜군들이 산골에 피난 중인 백성들을 살육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튿날인 11일 새벽에 이순신은 전날 싸운 곳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왜군들은 밤새 남은 배를 이끌고 도망하였다. 이순신은 어제 싸운 곳을 돌아보았다. 왜군은 전사한 왜군의 시체를 12군데에 모아 쌓고 불태웠는데 아직도 타다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흩어져 있었고 피가 안골포 성 안팎에 흘린 피가 곳곳에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왜적들의 사상자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3)
한편 68세의 일본 수군 도노오카 진자에몬은 1592년 7월 28일에 부산포에서 기술한 ‘고려선 전기(高麗船戰記)’(최관·김시덕 공저,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 해제, p 217)에서 안골포 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와키자카 님의 전투 소식을 들으신 구키 요시타카님과 가토 요시아키 님은 부산포에서 출발하여 가덕도를 지나 안골포 항에 들어갔다. 10일 오전 8시경부터 적의 큰 배 58척, 작은 배 50척 가량이 공격하여 왔다.
큰 배 가운데 3척은 메꾸라부네(盲船,장님배,거북선을 말함)로, 쇠로 방어를 하고 (쇠로 되어 있는 요해 要害) 대포·불화살·끝이 둘로 갈라진 화살 등을 쏘았다. 오전 8시경부터 오후 9시경까지 번갈아 공격하여 아군 배의 고루(고루)며 통로며 발을 보호하여 주는 방어 시설까지 모두 부수었다.
그 대포는 15척(약 150cm) 길이의 단단한 나무 끝을 철로 두르고 철로 된 날개도 삼면에 붙이고, 적으로 향하는 끝 쪽에는 폭이 1척 2-3촌(약 36cm)되는 끝이 둘로 갈라진 화살을 붙인 무기이다. 불화살은 끝에 철을 둥글고 튼튼하게 붙인 것이다. 이런 화살을 3~5간(間 약 6~10m) 거리까지 다가와 쏘았다.
구키님은 니혼마루 배의 고루에서 조총을 쏘셨는데, 적이 쏜 대포를 한 발도 맞지 않았으니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다. 구키 요시타카의 기슈쿠 배가 가토 요시아키의 큰 배와 마주하고 작은 배들이 그 사이에 위치하여 조총을 쏘았다. 기슈쿠 배와 가토 요시아키의 큰 배에서 대포를 쏘아대니 적군은 부상자 ·전사자가 다수 발생하여 섬들로 후퇴하였다. 기슈쿠 베에서도 부상자 ·전사자가 다수 발생하였기 때문에 부산포로 후퇴하였다.
(중략) 지쿠젠 나고야 본진에 계신 다이코 히데요시 님은 매우 기뻐하시며 구키 요시타카에게 주인장을 보내어, 도도 다카토라님·간 미치나가 님과 협력하여 육해군은 배의 척 수에 따라 지시대로 당책산(唐冊山)에 성을 쌓아 그곳에서 싸울 것이며, 경솔히 싸움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명하셨다.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p 317-319)
7월 11일 오전 10시쯤 연합함대는 양산강과 김해포구 및 감동포구등 주변해역을 수색하였으나 왜군의 그림자를 전혀 볼 수 없었다. 이러자 이순신은 가덕도 바깥으로부터 동래의 몰운대에 이르기까지 배를 늘려 세워 진을 치게 하고 주변 해역에 왜선의 존재 유무를 정밀하게 탐망하도록 탐망군을 보냈다. 이날 밤 8시쯤에 금단곶 연대로 갔던 탐망군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이 보고했다.
“ 금단곶 연대에서 탐망할 예정으로 올라갔을 때, 산봉우리 아래 작은 암자에 늙은 스님이 홀로 있어서 함께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김해와 양산 방향을 바라보니 적선이 늘어서 있는 수는 두 곳을 합하여 100척쯤 되었습니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요사이 날마다 왜선이 떼지어 드나들었는데, 50여 척씩 드나들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제 안골포 접전때 포 쏘는 소리를 듣고서는 지난밤에 거의 다 도망치고 지금은 100여척만 남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왜적이 두려워서 도망친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정보였다.
11일 저물녘에 이순신은 가덕도 옆의 천성보에 잠깐 머물면서 조선함대가 오래 머물 것처럼 속인 뒤에, 야간 항해를 통해 12일 오전 10시쯤 한산도에 도착했다.
한산도에는 지난 8일 한산 해전에서 목숨을 건진 왜군들이 연일 굶어서 걸음을 잘 걷지 못한 채 해변에서 졸고 있었는데, 거제도의 군사와 백성들이 이미 머리 3급을 베었고, 나머지 왜군들은 새장 속의 새같이 갇혀 있었다.
그런데 전라도 좌우수군은 군량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금산의 적세가 크게 성하여 이미 전주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이 연달아 도착하여, 한산도에 있는 왜군은 거제도의 군사와 그 백성들이 힘을 합쳐 목을 베고 그 수급을 통고하도록 경상우수사 원균과 약속하고 13일에 전라좌수영 본영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선이 많이 온다는 헛소문을 듣고서 한산도의 포위를 풀고 철수하는 바람에 한산도에 상륙한 왜군들은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로 탈출하였다. 이순신은 9월 10일에 조정에 올린 장계 ‘포위되었던 왜병이 도망친 일을 아뢰는 계본’에서 솥 안에 든 고기가 마침내 빠져 나간 것 같아 매우 통분하였다고 적었다.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p 80)
그러면 한산대첩과 안골포 해전에 관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살펴보자.
먼저 1592년 6월 21일의 ‘선조실록’이다.
“이때 동래가 이미 함락되어 왜적들이 계속 몰아쳐 곧장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선조의 어가가 이미 서로(西路)로 들어가자 황해도 이남에서 동래까지 오직 패전 소식만 들려오고 전혀 다른 소식은 없었다. (중략) 7월 6일에 이순신이 이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 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이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 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후략)”
다음은 1592년 7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이다.
“이순신이 왜병을 고성 견내량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때에 왜적이 수군을 크게 출동시켜 호남으로 향하자 이순신이 이억기와 함께 각기 거느린 군사를 재촉하여 나가다가 견내량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는데, 적선이 바다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원균이 앞서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兵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令)을 내려 거짓 패하여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하였다.
이에 한산도 앞 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砲焰)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 척을 남김없이 격파하니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또 안골포에서 그들의 구원병을 역습하여 패배시키니 적이 해안으로 올라 도망하였는데 적의 배 40척을 불태웠다. 왜진(倭陳)에서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의 한산도 전투에서 죽은 왜병이 9천 명이다.’고 하였다.
이 일을 아뢰자 이순신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자계(資階)를 상으로 내리고 하서(下書)하여 칭찬하였다.”
주1) 안골포에 머문 수군들은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陸)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이끄는 수군이었다.
주2) 장편전(長片箭)은 긴 화살인 장전(長箭)과 아기살인 편전(片箭)을 말함. 편전은 주로 총통에 넣어서 쏘았다.
주3) 안골포 해전은 1592년 7월 15일에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견내량파왜병장’에 주로 의존하였다.
(참고문헌)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성한, 7년 전쟁 3권, 산천재, 2012
o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o 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아카넷, 2013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1권, 비봉출판사, 2006
o 이순신 지음·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
o 이에인 디키 등 5인 지음 ·한창호 옮김, 해전의 모든 것, Human &Books, 2010
o 최관 ·김시덕 공저,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 해제, 도서출판 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