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율포해전
- 작성일
- 2022.10.0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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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25회 율포해전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2년 6월 7일 새벽에 이순신은 함대를 이동하여 웅천 땅 증도(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실리도) 앞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주변을 탐색했다. 오전 10시 즈음 가덕, 천성(天城)에서 적의 종적을 정탐하던 탐망선의 진무 이전과 토병 오수 등이 왜인의 머리 2급을 베고 급히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가덕 바다 위에서 왜인 3명이 배 한 척에 타고 있다가 우리를 보더니 북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추격하여 적 3명을 모두 쏘아 죽이고 머리를 모조리 베었습니다. 그중에 머리 1급은 경상우수사의 군관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림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위력으로 강탈해 갔습니다.”1)
이순신은 탐망선의 진무 이전과 토병 오수 등에게 각별히 술을 먹이고 곧 천성 등지로 돌려보냈다.
이윽고 이순신은 출발하여 정오경에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함대는 율포(栗浦 거제시 장목면 율천리 밤개)에서 나와 부산 쪽으로 도망하는 일본의 대선 5척과 중선 2척을 발견하였다.
조선 수군은 역풍을 받으면서 율포 앞 2km 근해까지 긴박한 추격전을 벌였다. 이러자 일본 수군은 배 안에 실은 짐짝을 모두 바다로 던지면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율포해전은 속전속결로 끝났다. 우후 이몽구가 왜대선 1척을 나포하고 머리 7급을 베고 또 1척을 불태웠고, 사도첨사 김완은 대선 1척을 온전히 사로잡아 머리 20급을 베고, 녹도만호 정운은 대선 1척을 사로잡아 머리 9급을 베었다. 광양현감 어영담과 가리포첨사(완도군 완도면 소재) 구사직은 힘을 합해 왜대선 1척이 육지로 내릴 때 추포하여 불사르고, 구사직은 머리 2급을 베고, 여도권관 김인영은 머리 1급을 베고, 소비포 권관 이영남은 소선을 타고 돌입하여 뒤쫓아 쏘아서 머리 2급을 베고, 나머지 빈 배 1척은 모두 협력하여 바다 가운데서 불살랐다. 이처럼 왜인들은 혹은 목이 잘리고 혹은 익사하여 섬멸되었다. 이 날 패한 왜장은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1557~1592)였다. 2)
한편 율포해전 승리로 잔뜩 고무된 조선 수군은 가덕 ·천성으로 향했다. 몰운대(沒雲臺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낙동강 하구에서 부산으로 돌아나가는 지점에 있다.)에 이르러 함대를 두 편으로 나누어 협공하며 수색하였으나, 왜적들은 배를 끌고 멀리 도망가고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연합함대는 오후 8시쯤 거제 땅 온천량의 송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로 돌아와서 그날 밤을 지샜다.
6월 8일에도 이순신은 적의 종적을 쫓기 위해 창원 땅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로 탐망선을 보내 수색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송진포에서 머물렀다.
6월 9일에도 이순신은 이른 아침에 함대를 띄워 웅천 앞 바다에 진을 치고 왜선을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조선수군은 함대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이순신은 내친김에 부산 등지로 진격하여 적을 섬멸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일 왜적을 만나 바다 위를 전전하면서 싸우느라고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도 매우 지쳤고, 전상자도 또한 많았으르로 편안히 숨어있는 적과 싸우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며, 부산으로 향하면 양산의 적들이 뒤에서 협공할 우려도 있었다. 더구나 전라병사가 보낸 공문에‘서울을 침범한 흉악한 무리들이 세미 운반선을 빼앗아 타고 서강을 거쳐 내려온다’하여 뜻밖의 사변도 염려스러웠다.
이순신은 이억기와 상의하여 다시금 가덕 등의 섬을 수색했으나 끝내 왜적의 종적이 없었으므로 곧 군사를 돌이켜 귀환하기로 하였다.
6월 10일, 이순신은 미조항 앞바다에서 연합함대를 해산하고 각자의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며 여러 장수에게 엄하게 말하며 진을 파하였다.
“한번 승첩했다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군사를 위무하고 전선을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급보를 듣는 즉시 출전하여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도록 하라”
이처럼 조선 수군은 5월 29일부터 6월10일까지 11일간에 걸친 2차 출전기간동안 네 번의 해전 즉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에서 왜선 72척을 격침시키고 왜군의 머리도 300여급(전라좌수군 88개, 원균과 이억기 200개 이상)베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전라좌수군 측 사상자도 많았다. 전사 13명 부상자 이순신·나내용·이설을 포함 37명으로 총 50명이었다. (그런데 경상우수군과 전라우수군 사상자 수는 이순신의 장계에 안 나온다.)
한편 6월 14일에 이순신은 당포해전 등의 전과를 알리는 장계(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를 썼다. 3)
“삼가 적을 쳐서 사로잡은 일을 아룁니다. 5월 27일에 원균의 공문을 받고 5월 29일에 홀로 전선 23척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노량 해상에서 원균의 전선 3척과 합류하였나이다.”로 시작한 장계는 사천해전, 당포·당항포·율포 해전의 경과를 소상하게 보고했다. 또한 적을 토벌할 때 남해 동쪽의 웅천등 7-8개 고을에서 피난민들이 적의 행방을 상세히 알려주었다고 하면서 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하여 왜선에서 얻은 쌀과 포목등의 물건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보고했다.
이어서 이순신은 장계와 함께 전리품으로 우후 이몽구가 얻은 금부채와 방답첨사 이순신이 찾은 분군기(分軍記) 6축을 보냈다. 아울러 왜적의 머리 88급에서 왼쪽 귀를 잘라서 소금에 절여 궤 속에 넣어 올려보냈다.
그런데 이순신이 네 번이나 접전할 때 죽은 왜적이 매우 많았으나, 왜적의 머리는 많지 않았다. 이는 이순신이 “ 공로와 이익을 탐내어 서로 다투어 먼저 적의 머리를 베려하다가는 도리어 해를 입어 사상자가 많아지는 일이 생기니, 사살한 뒤에 비록 목을 베지 못하더라도 힘써 싸운 자를 공로자로 정하겠다”고 휘하 장수들에게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상우수사 원균은 접전 후에 협선을 보내어 왜적의 시체를 거의 다 거두어 목을 베었을 뿐만 아니라(예, 방답첨사 이순신이 당항포 해전에서 죽인 왜군 수급 50급을 챙김), 경상도 연해안의 보자기(바닷속에 들어가서 조개, 미역등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화살에 맞아 죽은 왜적의 머리를 많이 베어서 이순신에게 갖고 왔지만, 이순신은 타도의 대장으로서 그것을 받는 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아서 원균에게 갖다 바치라고 타일러 보냈다. 이리하여 원균과 이억기 등 여러 장수들이 적을 벤 것이 거의 200급이 넘었다.
한편 이순신은 왜적의 물품 중에 쌀과 포목 등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혹은 군사들의 식량으로 보충하였다고 보고했다.
이어서 이순신은 사망하거나 부상한 전라좌수군 명단을 일일이 장계에 적었다. 먼저 사망자 13명(철환 10명, 화살 2명, 칼 1명)의 명단이다.
본영 지휘선 정병 김말산 (철환)
우후선 방포 진무 장언기 (철환)
순천 1호선 사부 배귀실 (철환), 사부 박훈 (화살)
순천 2호선 격군 막대, 격군 내은석 (촬환)
보성 1호선 사부 개이 (철환)
흥양 1호선 전장 난성 (철환) 사부 손장수 (칼)
사도 1호선 사부 진무 장희달(철환) 사부 진무 김종해(화살)
여도선 사공 토병 박고산 (철환), 격군 박궁산 (철환)
다음은 부상자 34명(철환 13명, 화살 21명)의 명단이다.
순천 1호선 사부 유귀희 (철환)
광양선 격군 남산수 (철환) 방포 장인 서천용, 사부 백내은손 (화살)
흥양 1호선 선장 박백세, 격군 문세, 훈도 진춘일, 사부 김복수, 내노 고봉세 (철환) 사부 배대검, 격군 말질손 (화살)
낙안 통선 사부 조천군, 수군 선진근, 무상 세손 (철환) 장흥 조방 고희성, 능성조방 최난세 (화살)
발포 1호선 사부 박장춘, 토병 장업동, 방포수군 우성복(철환)
보성 1호선 군관 김익수, 사부 오언룡, 무상 흔손(화살)
방답선 방답첨사의 종 언용
사도 1호선 군관 진무성·군관 임홍남, 사부 김억수·사부 진언량, 신선 (新選)허복남, 조방 전광례, 방포 장인 허원종, 토병 정어금(화살)
여도선 사부 석천개, 유수, 선유석 (화살)
그런데 부상자 명단에는 사천해전에서 부상한 이순신과 나대용·이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이순신과 나대용·이설을 포함하면 총 37명이 부상당했다.
사상자 중에는 당포해전 때 왜군 배에 올라 접전한 사도 1호선 수군이 사상자가 가장 많았다. 사망 2명, 부상 8명 도합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전체 사상자 50명의 20%에 해당했다.
이순신은 전사자는 각기 그 장수에게 명하여 별도로 작은 배에 실어서 고향으로 보내어 장사 지내게 하였는데, 그들의 처자들은 휼전(恤典)에 의하여 돌보아 주라고 지시하고, 중상에 이르지 아니한 사람들은 약물을 지급하여 충분히 치료하도록 하라고 각별히 신칙하였다.
이순신은 장계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중위장 권준, 전부장 이순신, 중부장 어영담, 후부장 배흥립, 좌부장 신호 우부장 김득광, 좌척후장 정운, 우척후장 김완, 구선 돌격장 급제 이기남 ·신의 군관 이언량, 좌별도장 이몽구, 우별도장 김인영, 한후장이며 신의 군관인 전 권관 고안책 그리고 대솔(帶率) 군관인 봉사 변존서(이순신의 외가 친척)· 나대용, 전 봉사 송희립 ·이설 ·신영배, 급제 김효성 ·배응록, 정로위 이봉수 등은 분연히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역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관원과 군사들도 앞을 다투어 적진으로 돌진한 사람들은 공로의 대소를 논의하여 포상하는 일을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 후에 결정하려면 행재소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길이 막혀 상을 주어야 할 시기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의 심정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당면한 일에 전념하도록 우선 공로를 참작하여 1,2,3등으로 나누어 별지에 기록하였습니다. 당초 약속대로 비록 목을 베지 못해도 죽음으로써 싸운 자를 1등 공로자로 한다고 하였으므로, 힘써 싸운 사람들은 신이 직접 등급을 결정하여 1등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삼가 아뢰옵나이다. 만력 20년(1592년) 6월 14일”
이순신은 장계를 송한련을 통해 선조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장계는 6월 21일에 평안도 용천에 피난중인 선조에게 전해졌다. 선조는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곧바로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하계)로, 이억기와 원균을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를 가자하였다.
1592년 6월 21일의 ‘선조실록’과 1592년 6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에 실려있다.
6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을 살펴보자
“이순신이 잇따라 왜병을 패배시켰다. 이순신이 본영에서 사량(蛇梁)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당포에서 적선을 만났다. 적장이 큰 군함을 타고 층루에 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이순신이 휘하 병력을 진격시켜 통전(筒箭)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니 층루 위의 왜장이 먼저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졌는데 마침내 엄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얼마있다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휘하의 수군을 모두 데리고 와서 회동하여 마침내 함께 당항포에 이르러 왜선을 만나 크게 싸웠다. 이때 또 선루(船樓) 위의 적장을 쏘아 죽이고 그 수급(首級)을 취했으며, 왜선 30척을 밀어부쳐 격파하니 적이 대패하여 육지로 올라 도망하였다. 또 영등포에서 싸워 모든 배를 나포하여 섬멸시키니 이로부터 수군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승리를 아뢰자 이순신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주1) 이처럼 경상우수군은 비열한 행동을 보였다. 경상우수영의 군관이 전라좌수영 탐망군의 왜적의 머리를 가로챈 것은 논공행상이 적의 머리 수에 근거하기 때문이었다.
주2) 이민웅(p 156)은 구루지마 미치유키는 해적출신으로 자신의 선단이 분멸하는 것을 보고 상륙한 뒤에 자결했다고 서술했고, 기타지마 만지(p 109)는 이순신이 율포헤전에서 구루지마 미치유키·미치후사 형제를 격파했다고 적었다. 구루지마 미치유키는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구루지마 미치후사(来島通総 1561~1597)의 형이다.
그런데 구루지마 미치유키는 다른 해전에서 죽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태훈 (p 161-162)·황원갑( p 183)·황현필(p 118)은 당포해전에서 죽었다고 적었고, 김종대(p 146)·배상열(p 313-315)은 당항포 해전에서 죽었다고 적었다.
주3) 이순신은 단독으로 장계를 작성하여 조정에 보냈다. 원균과 이억기도 별도로 장계를 보냈는데 장계 내용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6월1일자 ‘선조수정실록’3번째 기사를 읽어보자.
“처음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聯名)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이순신이 말하기를 ‘천천히 합시다.’ 하고는 밤에 스스로 연유를 갖춰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는 상황을 모두 진술하였으므로, 원균이 듣고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공로를 아뢰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생긴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o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o 김세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온새미로, 2011
o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가디언, 2012
o 김태훈 지음,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일상이상, 2014
o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제1권, 비봉출판사, 2006
o 배상열, 난중일기 외전, 비봉출판사, 2007
o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o 신호영, 이순신의 전쟁, 돋을새김, 2012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이순신 지음 · 조성도 역, 임진장초, 연경문화사, 1997
o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 옮김,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o 이순신 역사연구회 저, 이순신과 임진왜란 1권,비봉출판사, 2005
o 조성도, 충무공 이순신, 연경문화사, 2004
o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마야, 2006
o 황현필, 이순신의 바다, 역바연,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