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전라 좌수사 이순신, 전란(戰亂)에 대비하다 (1)
- 작성일
- 2022.07.29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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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 10회 전라 좌수사 이순신, 전란(戰亂)에 대비하다. (1)
김세곤 지음 (호남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1591년 2월 13일에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이었다.
당시에 나대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 전선 건조를 감독하고, 군병의 출납을 담당하는 군관)이었다. 1606년(선조 39) 12월 24일 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가 정리한 1591년의 나대용 장군 약사(略史)도 ‘선조실록’과 같다.
“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 및 각종전구감조군관이 되어 그 소임을 다함”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2015, p 303)
이은상이 지은 ‘체암 나대용 장군 기적비문’도 함께 읽어보자.
“28세에 무과에 올랐으나 미관말직에서 허덕이다가 왜란이 일어나기 전년(1591년) 장차 국난(國難)이 있을 것을 알고 또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소식을 듣고 종제 치용(從弟 致用)과 함께 충무공을 찾아가니 나이 36세였는데 충무공에 있어서는 장군과 같이 문무기술을 겸전한 동지를 만난 것은 여간 득의(得意)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군이 거북선 감조군관으로 실질적인 기술자 였음은 왕조실록과 충무전서와 나주읍지 등에 밝히 적혔고”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p 323-324)
이처럼 나대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 막하에서 전선 건조를 감독하고, 병력 충원을 담당하는 중책(重責)을 맡았다.
전라좌수영 여수에 부임 이후 이순신은 전란(戰亂)에 대비했다. 유비무환
(有備無患) 활동은 수군 충원, 전선(판옥선) 건조·수리 및 화포와 무기 정비, 군기(軍紀)확립과 군사훈련, 각종 방어시설 설치, 그리고 바다에 쇠사슬 설치와 거북선 창제였다.
그러면 조목별로 자세히 살펴보자.
1. 수군 충원
전란에 대비한 가장 중요한 일은 수군 충원이었다. 조선 초기 이후 육군과 수군은 독립된 병종이었는데 수군은 육군에 비하여 기피 현상이 심했다. 수군은 1년에 6개월이나 배를 타고 근무하는 반면에 육군은 1년에 3개월만 근무하면 되었다. 따라서 수군은 신분은 양인이지만 일은 천민과 다름없다’는 신량역천 (身良役賤)인식이 조선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다.
이순신은 수군 충원을 직접 챙겼다. 1592년 1월부터 4월까지의 난중일기에 여러 군데 나온다. (이순신은 1592년 1월 1일부터 난중일기를 썼다)
1월 3일
맑음. 동헌에 나가 별방군(別防軍)을 점고(點考)하고 각 관아와 진영에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1월 19일
맑음. 공무를 본 뒤 각 부대를 점검했다.
2월 16일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 활 여섯 순(1순은 화살 5대임, 6순은 30발)을 쏘았다. 새로 들어온 군사와 임무를 마친 군사(新舊番)들을 검열했다.
3월 1일
망궐례를 하였다. 식사 후에 별방군과 정규병을 점고하고, 하번군(下番軍)은 점고하고서 돌려보냈다. 공무를 마친 후에 활 열 순을 쏘았다.
(매월 초 별방군이 소집되었고 이들은 2개월 동안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번군이 근무하고, 근무를 마친 하번군은 집으로 돌아갔다.)
3월 2일
승군 1백 명이 돌을 주었다.
(이를 보면 별도의 승군이 조직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월4일
승군들이 돌 줍는 일을 게을리하므로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다가 매를 때렸다.
4월 1일
흐림.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별조방군(別助防軍)을 점고(點考)했다.
4월 17일
저녁 늦게 활 5 순을 쏘았다. 그대로 번을 서는 수군과 새로 번을 서는 수군이 잇달아 방비처로 왔다.
(이순신은 상·하번 병력을 정기적으로 교대시키면서 인력을 일일이 점검했다.)
4월 19일
군역을 하러 온 군사 7백명이 검열을 받고 일을 하였다.
이처럼 이순신은 상비 병력을 직접 챙겼다. 실무를 맡은 군관 나대용의 공로도 컸다.
여기에서 전라좌수군의 형태를 보면 별방군 외에 포작(鮑作), 토병(土兵), 사노(私奴), 관노, 승군 등 여러 신분의 하층민이 광범위하게 수군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포작은 해상을 떠돌면서 고기잡이를 하는 천민층으로서 이순신이 5월 4일에 옥포로 출전한 배 85척 중 포작선(고기잡이 배) 46척이 동원되었다. (나머지 39척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이었다.)
토병(土兵)은 1592년 1월 16일자 ‘난중일기’에 나온다.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는 석수장이인데 돌 뜨는 곳인 선생원(先生院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채석장)에 가서는 동네 개를 잡아 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렸다.”
토병은 비정규군으로서 변방의 각 진보(鎭堡)에 설치된 특수군이었다. 토병이 될 수 있는 자격은 그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라 현지의 지리뿐만 아니라 적정(敵情)을 파악할 수 있는 자라야 가능했다. 토병은 처음에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의 국경지대에 설치되었으며 부방(赴防)을 조건으로 하여 최전선 초소에서 경작지를 지급받으면서 영주하였다. 일종의 용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라도 수군은 이미 중종 때부터 토병이 있었다.
1508년(중종 3) 8월에 전라도 수사(水使) 이종인이 아뢰었다.
"신이 부임한 곳은 방어가 아주 긴요하므로, 경군관(京軍官) 10명을 데리고 갔으나, 물에 관해서 익숙하지 못하여 풍파를 만나면 모두가 기력을 잃으니, 이 중에서 5명을 덜어 토병(土兵)으로 갈아주소서. 또 갑자기 왜인의 내구(來寇)가 있으면, 말로 서로 통할 일이 아니므로 통사(通事)를 데리고 가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화포장(火炮匠)으로 1명을 갈아주소서."
이러자 중종은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1508년 8월 23일 2번째 기사)
또한 옥포승첩부터 부산포 승첩까지 이순신이 장계에 올린 전라좌수군 사상자 중에는 토병, 포작, 사노, 관노, 승군들이 많았다. (조원래, 새로운 관점의 임진왜란사 연구, 2005, p 241-242)
한편 전라좌수영의 지휘 체제는 제승방략이었다. 제승방략은 외적이 침략하면 그 주변의 진에 있는 병사들이 일정한 거점으로 집결하여 합동작전을 벌이는 분군법(分軍法)으로, 평시에는 예하 군사들이 오관오포에 머물지만 전시에는 전라좌수사의 명에 따라 전라좌수영으로 집결하여 좌수사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2. 전선(판옥선) 보수와 건조, 무기 보수 및 제조, 그리고 거북선 창제
가. 전선의 보수와 건조
각도의 수군절도사와 첨사, 만호가 거느리는 전선은 각각 4척, 2척, 2척으로 정해졌다. 이 원칙은 5관 5포에도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본영과 휘하 5관 5포에 전선을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순신은 좌수영 본영 선소(여수 진남관 아래 이순신 광장)에서도 전선을 건조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본영 거북선이었다.
3월 12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식후에 배 있는 곳(본영 선소)으로 가서 경강선(서울 한강에 근거를 두고 지방을 오가는 배)을 점검하였다. 배를 타고 소포(여수시 종화동 종포)로 나가는데 때마침 동풍이 세게 불고 격군(格軍 보조 사공)도 없어 다시 돌아왔다.
나. 무기 보수 및 제조
이순신은 활과 화살, 화약과 화포 창과 칼을 일일이 살펴 병사들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만들어 채우도록 하였다.
돌산 금오도, 경도 등에서 베어낸 목재와 여수 오동도에서 잘라낸 화살용 시누대등은 전함과 무기 정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 거북선 창제
이순신은 왜군의 장점인 백병전에 대처할 새로운 형태의 전선을 만들었는데 바로 거북선이다. 거북선을 설계·제조한 이는 군관 나대용이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4월 12일에 지자·현자총통 사격을 마쳤다. 3일 후인 4월 15일에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최초의 변보(變報)를 접하였다. (거북선 창제에 관하여는 12회에서 자세히 연재한다)
3. 군기(軍紀) 확립
당시 여건을 보면 벼락출세한 이순신을 보는 휘하 장수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군들도 적당히 시간이나 때우려고 했을 것이다. 이런 여건 속에서 이순신은 발로 뛰고 눈으로 확인하는 현장 중심의 리더십을 발휘했고, 신상필벌을 통해 군기를 확립했다.
1592년 1월부터 4월까지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이순신은 군기를 엄정하게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1월 16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고을 전 현직 관리들과 색리(아전)들이 인사차 왔다. 방답진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고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우후, 가수(假守 임시지휘관)들이 제대로 감독을 소홀히 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병선을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만 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土兵) 박몽세는 석수장이인데 돌 뜨는 곳인 선생원(先生院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채석장)에 가서는 동네 개를 잡아 먹는 등 민폐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때렸다.
2월 15일
새로 쌓은 해자(垓字 성 밖으로 둘러 판 못)가 많이 무너졌으므로 석수장이들에게 벌을 주고 나서 다시 쌓게 하였다.
3월 6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에 나가 무기를 검열하였다. 활 ·갑옷 ·투구 ·화살통 · 환도 등이 깨어지고 낡아서 볼품없이 된 것이 많았다. 담당 아전과 활을 만드는 궁장(弓匠), 감고(監考 물품 출납원)등을 처벌하였다.
3월 23일
아침밥을 먹은 뒤 동헌에서 일을 하였다. 보성에서 보내와야 할 판자를 아직도 납부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공문을 띄워 아전을 잡아들였다. 순천에서 잡아 보낸 소국진에게 매 80대를 때렸다.
4월18일
저녁에 순천 군사를 거느린 병방이 석보창(여수시 봉계동 석창)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지 않으므로 잡아다 가두웠다.
4월 22일
새벽에 정찰하고 부정 사건을 조사할 일로 군관을 내보냈다. 배응록은 절갑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로 가고, 송일성은 금오도(여수시 돌산읍)로 갔다.
이처럼 이순신은 신상필벌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난중일기’를 읽어 보면 지나치게 가혹하게 처벌한 듯한 느낌도 든다.
4. 수군 훈련
이순신은 여수 오동도에서 수군 훈련을 하였고, 이순신을 비롯한 장수들은 전술 훈련과 활쏘기 등을 하였다. 또한 군관과 진무(鎭撫 각 진의 실무책임자)들에게 병법을 숙지시켰다.
가. 활쏘기 훈련
‘난중일기’에는 활쏘기 기록이 가장 많이 나온다. 활쏘기는 조선 수군의 필수 전투 방식이었다. 이순신은 자주 활쏘기를 하였고, 군관들에게도 활쏘기 시합을 시켰다.
1월 12일
본영과 각 진포의 진무들이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1월 14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마친 후에 활쏘기를 하였다.
1월 18일
지난 12일의 활쏘기대회 성적 우수자에 대한 장계와 포상자 명단을 봉해 전라감영에 보냈다.
1월 25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마친 후에 활쏘기를 하였다.
1월 30일
동헌에서 일을 마친 후에 활쏘기를 하였다.
2월 2일
동헌에서 공무를 보았다. 활 10순(화살 5대가 1순이다. 즉 50발)을 쏘았다.
2월 5일
동헌에 나가 일을 본 뒤 활 18 순(90 발)을 쏘았다.
2월 8일
거북선에 쓸 돛배 29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쏘기를 하였다. 조이립과 변존서가 시합을 겨루었는데 조이립이 졌다. (변존서는 이순신의 외사촌 동생인데 이순신을 보좌하였다.)
2월 12일
아침밥을 먹은 뒤 동헌에 나가 일을 하다가 해운대(海雲臺)로 가서 활쏘기를 하였다. (성밖에 있는 해운대는 여수 동북쪽 마래터널 입구와 여수 신항 사이에 있는 대(臺)이다. 그런데 해운대는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일제때 철도를 놓고 뒤이어 신항을 만들면서 해운대를 헐어 버렸기 때문이다.)
2월 16일
동헌에 나가 일을 한 뒤에 활 5순을 쏘았다.
3월 5일
둥헌에 나가 일을 보았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4월 6일
진해루(여수시 진남관 아래 누각)로 나가 공무를 본 뒤 군관들에게 활쏘기 훈련을 시켰다.
4월 11일
일을 마친 후에 활쏘기를 하였다.
4월 12일
아침밥을 먹은 후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아보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가서 활 10 순을 쏘았다. 관아에 올라갈 때 노대석을 보았다.
4월 13일
동헌에 나가 일을 한 뒤에 활 15 순을 쏘았다.
4월 14일
동헌에 나가 일을 한 뒤에 활 10 순을 쏘았다.
4월 17일
늦게 활 5순을 쏘았다.
나. 병서 숙지
3월 5일에 저녁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좌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병서를 보내왔다. 수륙전(수陸戰)과 화공전법(火攻戰法) 등 갖가지 전술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전술이다. (1592년 3월 5일 난중일기)
이순신은 군관과 진무들에게 이 병서를 실제 상황에 응용할 수 있도록 숙지시켰다. 아쉽게도 이 병서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o 배상열, 난중일기 외전, 비봉출판사, 2007
o 이민웅, 이순신 평전, 성안당, 2012
o 이봉수, 이순신이 지킨 바다, 가디언, 2021
o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2010 p 49-65
o 이순신 지음, 송찬섭 엮어 옮김, 난중일기, 서해문집, 2004, p 23-43
o한일관계사연구논집편찬위원회편, 임진왜란과 한일관계,경인문화사, 2005
o 해군충무공리더십센타 편집, 충무공 이순신, 해군교육사령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