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
- 작성일
- 2022.07.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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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장군 –6회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
김세곤 지음 (호남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일본에 조선통신사 파견
1590년 3월 6일에 조선 통신사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書狀官) 허성, 무관 황진 등이 일본 사신 현소 일행 등과 함께 서울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4월 29일에 부산을 떠나 대마도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조선통신사 는 6월에 일기도와 하카다(후쿠오카) 등을 거쳐 7월 22일에야 교토에 도착했다.
교토에서 통신사 일행 50명은 대덕사(大德寺 다이도쿠지)에 머물렀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동쪽 지방에 출정하여 조선통신사는 히데요시를 만날 수 없었다. 9월 초에 히데요시가 교토로 돌아오자 이번엔 히데요시의 저택인 쥬라쿠타이를 수리 중이어서 접견이 연기되었다. 11월 7일에야 조선통신사 일행은 쥬라쿠다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8개월 만이었다.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먼저 히데요시에게 선조가 보낸 국서를 전하였다. 선조의 국서에는 조선통신사를 보낸 것은 히데요시의 일본 전국 통일을 축하하고 양국간의 우호를 돈독히 하자는 뜻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일본 통역관은 조선통신사를 복속 사절로 소개했다. 이러자 히데요시는 매우 기뻐하면서 명나라를 침략해도 되겠다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조선이 대마도의 복속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p 37)
히데요시의 오만은 조선통신사들에 대한 접대에서 표출되었다. 일본 신하들은 자리를 삼중으로 만들고 바닥에 앉았는데 머리에는 사모(紗帽)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우리 사신이 도착하자 여러 명의 신하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가 자리에 앉도록 인도하였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앞에는 탁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위에 떡 한 접시가 있었다. 또 옹기 사발로 탁주를 돌려 마셨는데 그 예법이 매우 간단하였다. 여러 차례 술잔을 돌리는 것이 전부여서, 절하고 읍하고 술을 주고 받는 절차도 없었다.
얼마 후 히데요시가 갑자기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히데요시가 웃으면서 시종을 부르니 한 여자가 공손히 대답하거 달려나와 그 아이를 받았다. (이 아이는 1589년에 태어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스쿠인데 1591년 8월에 죽었다) 이윽고 히데요시는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는데 방약무인(傍若無人)의 태도로 굴었다.
황윤길과 김성일등은 곧 작별하고 물러나왔는데, 그 뒤로 다시는 히데요시를 만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정사와 부사에게 각기 은 4백 냥을 주고 서장관 이하는 차등을 두어 은을 주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선조에 대한 답서를 곧바로 주지 않았다. 통신사는 답서를 기다리다가 11월 11일에 교토를 떠났고, 11월 20일에 사카이(오사카에 닿아 있는 항구 도시)에서 대기하는 동안에 답서를 받았다. (답서는 상국사 주지 세이쇼 조타이가 지었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답서를 읽고 조선통신사는 경악했다. 조선 국왕에게 ‘정명향도(征明嚮導 명나라를 치는 데 길잡이가 되라)’를 명한 것이다.
그러면 히데요시의 답서를 읽어보자.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 국왕 합하(閤下)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60여 주(州)가 근래에 서로 나누어져 나라 기강이 문란하고 선대의 예법이 무너져 조정의 명령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한탄과 격분을 이기지 못하여 3, 4년 사이에 반역의 무리를 치고 도당을 토벌하여 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나의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이지만, 나를 처음 배태할 때 어머니가 ‘품 안으로 태양이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하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햇빛 비치는 곳은 내가 다스리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요, 장성하면 천하를 다스리고 그 위세가 사해(四海)에 떨칠 것이 분명하다.”하였습니다.(히데요시는 자신이 태양의 아들임을 신비화시키고 있다. - 필자 주) 이처럼 기이한 징조로 인하여 나에게 적개심을 가진 자는 자연히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고아와 과부들을 불쌍히 여겨 돌보았으므로 백성들이 풍성하고 재물이 풍족하여 공납(貢納) 받는 것이 옛날보다 만 배나 불어났습니다. 우리나라 개국 이래로 조정의 번성함과 수도(首都)의 화려함이 오늘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한 평생이 백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여기에만 있겠습니까.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들어가 준다면 장래에는 희망이 있을 것이요 눈앞에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멀리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뒤늦게 나아오는 무리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국에 들어가는 날 (조선이)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군 진영으로 향한다면, 두루 이웃과 더욱 화친을 도모할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다른 것이 없고 단지 아름다운 명예를 삼국(三國)에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부디 몸을 보중하고 아끼십시오.
- 1590년 겨울에, 히데요시는 받들어 답서한다.
히데요시는 답서에서 자신의 목적이 단순히 조선과의 통교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조선이 명나라를 침입할 때 길잡이로 나설 것을 요구한 것이다. 즉
정명향도(征明嚮導) 요구였다.
한편 부사 김성일은 전하(殿下)를 합하(閤下)라 하고, 예폐(禮幣)를 방물(方物)이라 하였으며, ‘또 한 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으로 들어간다.’느니 ‘귀국이 선구가 되라.’는 등의 말이 있음을 보고 현소에게 바로 편지를 보내어 이 표현을 고치지 않을 때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국서를 가지고 갈 수 없다 하였다.
현소는 회답을 보내어 사과하고 국서를 작성한 사람의 실수라고 변명하고 합하를 전하로 방물을 예폐로 수정했다. 그러나 ‘귀국이 선구가 되라’는 등의 협박적인 문구에 대해서는 ‘이는 대명에 입조(入朝)한다는 뜻’이라고 핑계대면서 전혀 고치지 않았다.
김성일은 다시 두 세 차례 서신을 보내어 고칠 것을 요청했지만, 현소는 따르지 않았다. 이에 황윤길과 허성 등은 ‘현소가 그 뜻을 스스로 이렇게 해석하는데 굳이 버티면서 오래 일본에 지체할 것이 없다.’면서 서둘러 부산으로 돌아왔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3월 1일 4번째 기사)
1591년 1월 28일에 조선통신사 일행이 부산에 배가 닿자마자 정사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국서를 급히 서울에 보내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터이니 곧 서울에 들어와 복명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2월 13일에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전라좌수사(정3품)에 승진 임명했다.
3월에 선조는 조선통신사를 접견했다. 정사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다. 선조가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해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위인이 못된다고 일축했다.
한편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히데요시의 모습은 이렇다
“히데요시는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의 소유자로서 한쪽 손의 손가락이 여섯 개인 육손이었다. 눈이 튀어나왔고 중국인처럼 수염이 적었다. 자식복은 없었으나 빈틈없는 책략가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과 영토와 재산이 순조롭게 늘어남에 따라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악행과 심술궂은 짓을 저질렀다. 가신 뿐만 아니라 국외자에 대해서도 극도로 오만했으므로 누구나 싫어했으며 그에 대해 증오심을 품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국립진주박물관 엮음,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p 11)
좌의정 류성룡이 선조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김성일에게 물었다. 류성룡과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같은 동인이었다.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兵禍)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김성일은 답변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3월 1일)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로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는 서인이 세력을 잃어 동인이 다시 집권했다. 1591년 2월에 서인의 영수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라고 건의하자 선조는 화가 나서 정철을 파직시켜 버렸다. 선조는 내심 인빈 김씨가 낳은 아들 신성군(?~1592)을 세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인이 집권하자 동인은 ‘서인들(西人)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동요시킨다’고 서인을 공격하여 서인은 조정에서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선조는 ‘전쟁이 없다’고 결론내리고 국론(國論)으로 정했다.
하지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의 영수 허엽의 아들임에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솔직하게 보고했고, 무관 황진은 김성일의 주장에 분개하여 그를 목 벨 것을 상소하려다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황희의 5대손이고 황윤길의 친척인 황진은 ‘히데요시의 답서에 명나라를 친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도 한마디 반박도 없이 답서를 받아와서는 김성일이 처벌을 받을 까 이렇게 망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황진은 일본에서 보검을 사면서 말하길 “오래지 않아 적이 오면 내가 이를 쓰리라”하였다. 황진은 원래 술을 좋아했으나 일본에서 돌아온 뒤로는 술을 끊고 여색을 멀리했다. 그는 재산을 털어 말을 사서 밤낮으로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하였다. (국립진주박물관, 싸워 죽기는 쉬어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혜안, 1999, p 27-29)
임진왜란 때 동복현감이었던 황진은 광주목사 권율과 함께 1592년 7월 8일에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을 맞아 전라도 금산의 이치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라도를 지켰다. 이후 그는 충청병사로서 1593년 6월 21일부터 28일까지 의병장 김천일·최경회·고인후 등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절했다.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보고가 있은 지 1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전란에 휩싸였다. 선조와 집권당의 오판이 나라를 토붕와해(土崩瓦解)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너무나 안일하고 무능했다.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면서 조총으로 무장한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을 하찮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