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별시 무과 합격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 작성일
- 2022.07.06 09:45
- 등록자
- 문화예술과
- 조회수
- 258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3회 별시 무과 합격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김세곤 지음 (호남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이 저작물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무단전제 및 복제를 금합니다.)
# 나대용, 별시 무과에 합격하다.
1583년 봄에 나대용은 별시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종8품)가 되었다. 나이 28세였다.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 장군 기념사업회가 작성한‘나대용 장군 약사(略史)’를 살펴보자.
. 1560년 (명종 15년)
향리 신동재에 설치한 사숙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소년기 시절을 보냄
. 1575년 (선조 8년)
영산강 유역에 출몰하는 왜구의 끊임없는 행패에 분노를 느끼고 뜻한 바 있어 개연히 투필(投筆)하고 무예 방면 수련에 전념함.
. 1583-1586
28세 되던 봄 무과에 합격하고 훈련원 봉사로 임명되어 군사훈련교관으로 그 임무를 다함
(사단법인 체암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세창문화사, 2015, p 302)
별시무과(別試武科)란 3년마다 치러지는 식년무과(式年武科)가 아닌 비정기 시험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특별한 행사를 기념하여 치러졌다. 이 당시 별시무과는 명나라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황사탄생경(皇嗣誕生慶)]하기 위해 치러졌는데, 선발인원은 500명[[甲 1, 乙 36, 丙463]이었다. 나대용은 65위로 합격했다. (만력 11년 계미9월 초3일 별시방목(萬曆十一年癸未九月初三日別試榜目)』:국립중앙도서관[한貴古朝26-28-6])
당시 무과 시험일은 1583년 8월 28일, 합격자 발표일도 8월 28일이었다.
이 때 나대용과 함께 합격한 동방(同榜 합격 동기생)은 이대원, 송희립, 안홍국,김축,신여량 등이었다.
무과에 합격한 나대용은 훈련원(訓鍊院) 봉사(종8품)로 근무했다. 성적이 좋아서 종8품으로 근무한 것이다. (1576년에 무과에 합격한 이순신은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종 9품)이었다. 1579년 2월에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를 하였고, 1582년 5월에 발포만호에서 파직된 후 복직하여 다시 훈련원 봉사로 근무했다)
훈련원은 1466년(세조 12)에 설치된 기관으로 병조의 속아문(屬衙門 소속기관)으로 무과시험과 금군(왕의 호위군대)의 시험을 주관하고, 무과 출신자와 예비 무인들의 군사훈련과 병서(兵書)의 강습을 담당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훈련원의 정원은 지사(知事, 정2품) 1인(겸직), 도정(都正, 정3품 당상관) 2인, 정(正, 정3품 당하관) 1인, 부정(副正, 종3품) 2인, 첨정(僉正, 종4품) 2인, 판관(判官, 종5품) 2인, 주부(主簿, 종6품) 2인, 참군(參軍, 정7품) 2인, 봉사(奉事, 종8품) 2인이었다. 그 밖에 습독관(習讀官)이 30인 있었다. 이들은 병요(兵要)·무경칠서(武經七書)·통감(通鑑)·장감(將鑑)·박의(博議)·진법(陣法)·병장설(兵將說)을 습독하고, 사어(射御)를 익혔다. 관원은 모두 무관으로 임용되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여기에서 나대용이 별시무과에 합격한 1583년의 일본의 정세를 살펴보자. 이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는 1582년에 100년간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천하 통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교토 혼노지(本能寺)에서 자결했다.
1467년에 일어난 오닌의 난은 호소카와 동군 16만 명과 야마나 서군 11만명이 11년간 싸운 내란이었다. 오닌의 난으로 교토는 초토화되었고, 막부는 실권을 상실하고 100년간 전국(戰國)시대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오와리(지금의 나고야) 출신인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의 가닥을 잡았다. 그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어서 조총부대를 양성했다.
1543년에 샴(지금의 태국)을 출발하여 중국으로 가던 포르투갈 상인을 태운 중국 배 한 척이 폭풍우를 만나 일본 규슈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 종자도)에 도착했다. 종자도 영주 도카타가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개인 소총 두 자루를 비싼 값에 구입했는데 이를 철포(鐵砲 뎃포)라 불렀다. 철포는 탄환이 순간적으로 발사되는 화승식(火繩式)으로 사격이 신속하고 정확했다.
이후 철포가 빠르게 보급되었고 전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가장 빠르게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이는 오다 노부나가였다. 조총수 양성에 진력한 노부나가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으로 최강의 기마군단 다케다 가쓰요리 군을 이겼다.
오다 노부나가는 3교대 연속 사격 전술을 썼다. 조총의 장전 시간이 꽤 걸리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총수를 3열로 배치시켜 맨 앞줄이 쏘고 앉으면 가운데 줄이 쏘고, 가운데 줄이 쏘고 앉으면 맨 마지막 줄이 쏘고, 다시 장전을 마친 맨 앞줄이 일어나 사격하여 기마군을 이긴 것이다.
1582년에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쥬고쿠(中國) 지방의 강적 모리 테루토모(毛利輝元)를 격파하기 위해 정벌에 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원하기 위해 5월 29일에 교토 혼노시(本能寺)에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6월 2일에 가신인 아케치 미츠히데가 1만명의 군대로 혼노시를 급습했다. 1백 명 정도의 호위군 밖에 없었던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의 배반 소식이 알려지자 "어쩔 방도가 없다(是非に及ばず)"라는 말을 남기고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자결하였다. 향년 49세였다.
당시에 빗추 다카마쓰 성 공략에 힘쓰고 있던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모리 가문과 화친을 하고 즉시 회군해 6월 13일에 교토의 야마자키에서 미쓰히데를 토벌했다. 미스히데가 반역한 지 12일 만이었다.
히데요시는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에서 지방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해는 ‘도요토미 역사이야기’에는 1537년으로, ‘다이코 내력기’에는 1536년 정월 초하루에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어 출생일시가 명확하지 않다. (야마지 아이진 지음, 김소영 옮김, 도요토미 히데요시, 21세기 북스,2012, p 37-38)
그런데 히데요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와 살았는데 의붓아버지는 히데요시를 학대했다고 한다. 때문에 히데요시는 집을 뛰쳐나와 무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방랑했는데, 18세인 1554년 무렵에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小者, 무사들의 시중을 드는 직책)로 일하게 되었다.
변소 지기에서 시작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짚신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며 따뜻하게 신을 수 있게 하고, 심부름을 가면 자신의 돈으로 물건값을 보충하여 누구보다 싼 값에 구해 오는 등 재치를 발휘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데다 때때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히데요시는 곧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이 무렵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용모를 보고 '원숭이', '대머리 쥐'라고 불렀다 한다.
1568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교토에서 정무를 보게 되었다. 일개 잔심부름꾼이 중앙 정계에서 관리로 활동한 것은 히데요시의 능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노부나가가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합리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573년에 히데요시는 오미 3개 군을 하사받고, 이마하마에 성을 축조해 성주로 부임했다. 이후 노부나가가 전국을 장악하면서 그도 전공을 세워 착실히 신분 상승의 계단을 밟았다.
히데요시 인생의 전환점은 1582년 6월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고 자결한 혼노지의 변이었다. 이때 모리와 전투 중이었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급사소식을 듣고 모리와 화의를 맺고 즉시 교토로 진군하여 미쓰히데를 패퇴시켰다.
기회를 잡은 히데요시는 1583년에는 노부다가의 중신 시바타 가츠이에를 멸망시키고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를 자살케 했다. 이 해에 히데요시는 오사카 성(大阪城)을 지어 천하 통일의 발판으로 삼았다.
1584년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와 그의 동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웠는데, 곧 화친하고 이들을 굴복시켰다.
1585년에 히데요시는 관백(關白)이 되고 1586년에는 태정대신이 되어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 히데요시는 1587년에는 큐슈의 시마즈 요시히사를 항복시키고 1590년에는 오다와라의 호죠씨와 동북 지방의 다이묘들을 복속시켜 일본을 통일했다.
한편 히데요시의 처음 이름은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오미 국을 평정한 뒤에 노부나가로부터 치쿠젠노카미(筑前守)의 관위를 받으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개명하였다. 이제 1585년에 관백이 되자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豐臣)라는 성을 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다.
아울러 히데요시는 자신이 ‘천황의 아들’이라고 선전했다. ‘관백임관기’에는 그의 조부모는 원래 궁정 귀족이었는데 모친이 3살 때 아이치 현으로 유배를 왔고, 교토 궁정 수랏간에서 2-3년간 일했던 모친이 성은을 입어 히데요시를 낳았다고 적혀있다.
1591년 9월 22일에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쓰루마쓰(1589~1591)가 세 살에 죽었다. 12월에 히데요시는 관백 자리를 조카(누나의 아들)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쓰구(1568~1595)에게 넘기고 자기는 태합(太閤)이 되었다. 1625년경에 편찬된 히데요시의 전기집‘태합기(太閣記)’는 히데요시를‘태양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어머니가 태양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아명(兒名)을 히요시(日吉)이라고 했다”
(박창기 지음,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아사, 2009, p 19-26)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기세를 몰아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인도(인도차이나 반도를 의미함)를 정복하고자 했다. (공교롭게도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구상과 일치한다)
1585년 7월 관백에 취임한 히데요시는 9월에 심복인 스에야스에게 명나라 정복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1586년 3월,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를 통해 세계 지리에 눈뜨게 된 히데요시는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가스파르 쿠에료 등에게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쿠에료는 군함 두 척과 승조원을 지원할 의향을 밝혔다. (기타지마 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p 16-18)
1587년 5월에 히데요시는 시마즈 세력을 복속시키고 규슈를 평정했는데, 이를 계기로 히데요시의 동아시아 정복 구상이 한층 구체화 되었다. 규슈를 정복한 히데요시는 1588년에 시마즈에게 류큐(지금의 오키나와)를 복속하여 입공할 것을 요구했고, 1589년에 류큐 왕국은 히데요시에 입공하였다.
한편 규슈 평정을 완료한 히데요시는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에게 조선 출병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1587년 6월에 요시시게는 조선 국왕이 히데요시에게 알현하는 조건으로 조선 출병 연기를 요청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조선 국왕의 알현을 승낙했고, 1587년 9월에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는 가신(家臣)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 귤강광)를 일본 국사(國使) 자격으로 조선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