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장군
- 작성일
- 2022.07.0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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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장군 -나대용 장군 평전-
김세곤 지음(호남역사연구원장,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시작하면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임진왜란 7년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 없이 2백 년간 태평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1592년 4월에 명나라를 친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미리 대비할 수 있었지만 선조 임금의 무능과 집권당의 안일, 그리고 장수들의 오만이 조선을 미증유의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1589년 8월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선조에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조총(鳥銃)을 바쳤다. 선조는 조총을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포르투갈로부터 수입된 혁신 무기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591년 3월에 선조는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를 접견했다. 그런데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은 선조에게 엇갈린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다.
선조가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해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위인이 못 된다’고 일축했다.
이러자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는 동인이 집권했기에 대세는 김성일에게 기울었다. 선조는‘전쟁 없음’으로 결론내렸다.
1592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4월 28일에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이 전사하자, 선조는 30일 새벽에 폭우를 맞으며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쳤다. 성난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에 불을 질렀다. 5월 3일 왜군은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왜군 침략 20일 만이었다.
6월 21일에 압록강 근처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하려 했다. 조선은 이미 전라도를 제외한 7도가 왜군 손아귀에 있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나라를 구한 것은 전라도 수군과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1591년 2월 13일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1545~1598)은 전란에 착실히 대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는 거북선에서 화포를 쏘는 훈련을 하였다.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은 화포와 당파전술로 왜선 26척을 분멸시켰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자신감을 얻었다. 5월 29일에 사천해전에서 첫 선을 보인 거북선의 활약으로 대승을 거두었고, 당포·당항포 해전에서도 압승했다.
7월 8일에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에서 학익진으로 왜군을 크게 이겼다. 이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 이순신과 싸우지 말도록 명령했다. 사실상 일본 수군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9월 1일에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본영인 부산을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다. 이렇게 4차에 걸친 10번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세계 7대 전함에 선정된 돌격선 거북선의 공이 컸다. 그런데 거북선을 설계·제조한 사람은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난 나대용 장군이다.
충남 아산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의 전시관에는 ‘이순신과 함께 싸운 사람들 명단이 적혀 있다. 여기에는 나대용이 권준, 정걸, 이영남, 정운, 어영담, 이운룡 등과 함께 있다.
“ 나대용(羅大用, 1556~1612) 거북선 건조 책임관
1591년에 나대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병선 연구에 힘썼는데 특히 거북선을 건조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1592년 옥포해전에서 유군장을 맡아 적의 대선 두척을 격파하고, 사천해전과 한산해전에서 각각 분전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1597년 명량해전과 1598년 노량해전에도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2022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30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전기(傳記)를 연재한다. 전기(傳記)는 평전(評傳)에 가까울 것이다.
이 전기는 임진왜란 7년 전쟁과 나대용 장군의 활약에 대하여 집중하면서,거북선의 건조 기술과 과학성 그리고 임진왜란의 시대적 배경 및 전쟁이 남긴 상흔과 교훈도 곁들일 것이다.
이를 위해 1차 자료인 조선왕조실록, 이순신의 난중일기·임진장초, 이충무공전서, 류성룡의 징비록, 난중잡록, 연려실기술, 나대용 관련 행장 등과 2차 자료인 임진왜란과 이순신·나대용 관련 책들(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체암 나대용 장군,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이순신과 임진왜란, 이순신 평전, 이순신 파워인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이야기 일본사, 7년 전쟁, 이순신의 7년 등)을 참고하여 연재할 것이다. 자료들 중에는 믿을 수 없는 자료도 있을 수 있기에 검증도 치열하게 할 것이다.
나대용 장군의 기록은 1606년(선조 39년) 12월 24일의 ‘선조실록’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를 읽어보자.
(경상우수사)겸삼도통제사(兼三道統制使) 이운룡이 치계(馳啓)하였다.
‘나주(羅州)에 사는 전 현령(縣令) 나대용(羅大用)의 상소 내용에 ‘신은 나주에서 성장하였다. 계미년(1583년)에 등과(登科)하여 6년 동안은 북쪽을 방어하였고 7년 동안은 남쪽을 방수(防戌)하였으며, 신묘년(1591년) 연간에는 수사(水使) 이순신(李舜臣)의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이 되었다.
임진왜변의 초기에 옥포(玉浦)에 머물고 있던 왜적이 진격해와 싸움을 벌일 때 신은 발포가장(鉢浦假將 임시지휘관)으로서 앞장서 돌격해 들어가 적선 2척을 포획하였고, 사천(泗川)·선창(船滄)·당항포(唐項浦) 등지의 15여 회에 달하는 전투에서는 모두 수공(首功)을 세웠으므로 이름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마침내 강진현감에 제수되었으며 그 뒤로 연이어 금구(金溝 전북 김제시 금구면)·능성(綾城 전남 화순군 능주면)·고성(固城 경남 고성군)의 현령에 제수되었다. (...) 신축년(1601 년) 11월에 모친 상(喪)을 당하여 돌아갔다가 연이어 부친 상을 만나 6년 동안 거상(居喪)하다 보니 당연히 해야 할 책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비로소 복(服)을 마쳤기에 한 가지 계책이 있어 구중궁궐에 찾아와 호소한다.
대체로 왜적을 막는 데에는 주사(舟師 수군)보다 앞설 것이 없다. 임진(1592년)·계사(1593년) 년간의 전선(戰船) 숫자는 거의 2백여 척에 달하였으나 오히려 부족하였다. 그런데 정유재란(1597년) 뒤에는 간신히 마련한 전선의 숫자가 삼도(三道)를 통틀어 60여 척이었으니 각처에 배분하는 데 있어 극히 소홀하여 뜻밖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니 뉘라서 숫자를 늘리는 것을 바라지 않을까마는 군사가 부족하여 만들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그 군사의 숫자로써 배를 늘리는 계책을 말해보겠다.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의 1백 25명 보다 적지 않으며, 활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신이 늘 격군을 줄일 방도를 생각하다가 기해(1599년)년 간에 (전라도)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별도로 전선(戰船) 25척을 감조(監造)하였을 때,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의 배를 만들었는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 이름을 창선(鎗船)이라 하였다. 격군 42명을 나누어 태우고 바다에 나아가 노를 젓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 활쏘기의 편리함도 판옥선보다 나았다.
그 뒤로 나라가 평화로워지자 한 번도 전쟁에 쓰지 않은 채 여러 해를 버려두어 썩어가고 있다. 이후로는 신분이 미천하다 보니 말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람들이 실답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다시는 만들지 않았고 그 제도 마저도 그대로 버려둔 상태이다. 만일 다시 이 배를 만들도록 하여 대소(大小)의 여러 장수에게 각기 1척씩 맡긴다면 배 숫자는 전보다 배나 되지만 사수와 격군은 더 늘지 않아도 저절로 충분할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 신(이운룡)이 임진년부터 이후로 수전(水戰)에 종사하여 전선의 모양에 대해서는 정묘하게 강구해 보지 않은 것이 없으나 창선의 제도는 일찍이 시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요컨대 격군 42명을 채워 싣고 바다를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한다면 선체가 협소하여 좌우에 방판(防板)을 설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방판을 제거시켜 버리면 시석(矢石)을 막을 수 없어 전투에 임해 손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대체로 임진·정유·무술년의 싸움에서는 모두 판옥선(板屋船)처럼 큰 배에 힘입어 이길 수 있었으니 이것은 이미 보아온 증거입니다. 신은 감히 그렇게 이용하기가 묘한 점을 생각해내어 만들지 못하겠습니다. 나대용을 조선차관(造船差官)으로 호칭하여 한 두 척을 감독하여 만들게 하여 편리한 지 여부를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삼가 갖추어 계문합니다."
선조는 이운룡의 치계를 비변사에 내려보냈다.
비변사의 계목(啓目)은 이렇다.
“계하(啓下)에 덧붙입니다. 창선에 대한 제도는 통제사가 일찍이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이라 하니, 장계에 언급된 대로 나대용을 속히 내려보내 감독해 만들게 하여서 쓸 만한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게 하소서. 이런 내용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선조는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하였다.
(선조실록 1606년 12월 24일 3번째 기사)
이처럼 나대용 장군은 1591년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감조전선출납군병 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 전선 건조를 감독하고, 군병의 출납을 담당하는 군관)이 되었고, 옥포해전·사천과 당포 해전·한산해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1594년부터 1596년까지 강진현감을 하였고 (선조실록 1596년 10월 11일), 금구현감이 되었다. 이어서 나대용은 명량해전·노량해전 등에 참전하였고, 1599년에는 전라도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창선(鎗船) 25척을 만들었다.
한편 삼도수군통제사 이운룡(1562~1610)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옥포만호로 원균의 휘하에 있었는데 원균이 전선을 버리고 도망가려 하자 율포만호 이영남과 함께 항의하며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옥포해전 이래로 큰 공을 세워 1604년에 선무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선무공신은 18명이다. 이순신, 원균, 권율이 선무 1등 공신이고, 2등 공신은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5명, 3등 공신은 권준, 이운룡, 이순신(李純信), 기효근 등 10명이었다. 그런데 선조는 의주로 피난 가면서 자신을 수행한 86명에게 호성공신을 녹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