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나무이야기여행_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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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보호수 탐방은 금성관(보물 2307) 뒷마당에 우람하게 자리 잡은 은행나무 두
            그루부터 시작합니다. 금성관 정청(金城館 政廳: 가운데 건물)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지요. 금성관은 나주의 진산으로서 사랑받고 있는 금성산에서 딴
            친근한 이름입니다.
               한편, 금성관은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있어 전주 풍패지관(豐沛之館, 보물 583호,

            전주객사)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의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풍패지관은 전주객사의
            별칭이며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금성관에 인접한 옛 개천의
            사마교도 1011년 고려 현종의 마차가 지나간 역사적인 다리입니다. 거란의 침입을 두
            차례나 격퇴한 현종의 네 마리 말이 이끈 행차가 지나간 다리라는 뜻에서 사마교라고
            불리지요. 지금은 현장의 가로수 느티나무 그늘에 ‘사마교비’가 세워져 있어요.
               고려의 성군으로 알려진 현종은 거란을 패퇴시킨 후 1018년에는 전라도로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후 오늘에 이릅니다. 그래서 ‘전라도 정도 천년’이라는
            행사들이 몇 년 전에 성대하게 개최되었었지요.
               1호 객사 보물인 풍패지관도 맞배지붕인데 비해 금성관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맞배지붕의 정청과 대비되는 희귀성을 갖습니다. 그 품위와 규모도 달라요.
            금성관  입구의  2층  망화루를  들어선  순간  궁궐  같은  앞뜰과  객사  건물의  크기에
            압도당하면서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금성관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정청(政廳), 즉 본관은 임금께 충성을 맹세하는
            망궐례(望闕禮) 의식를 치르는 공간으로 사용하였으니 지방 궁궐이기도 했습니다. 동쪽의
            별관인 동익헌의 벽오헌(碧梧軒)과 서쪽 서익헌은 숙소로 사용되었지요. 또 하나 금성관의
            자랑거리는 우리나라의 객사 중 가장 완벽한 모습을 갖춘 점이에요.

               따라서 나주 보호수 답사 1번지는 단연코 이 두 그루 은행나무부터 시작해도 모두들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은행나무는 금성관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나주에서 최초로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수령이 700년 가까운  역사적인
            나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굵기나 높이도 감탄을 자아내고 위치하는 장소도
            나주목의 객사라는 금성관 뒤뜰이라 역사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는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 동안 아주 친근한 나무입니다. 보호수를 뛰어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만 해도 전국에 25그루가 될 정도이지요. 대표적으로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를  들  수  있어요.  용문사  은행나무는  수령이  무려
            1,100년이나 되고 키도 가장 커서 무려 42m에 이른답니다. 나무의 건강과 장수를 말해

            주는 줄기 둘레도 14m나 되니 금성관 은행나무의 거의 두 배나 되지만 금성관 은행나무도
            주위 생육여건이 아주 좋아 앞으로 천년수 이상이 될 겁니다.


                                                               제1장 천년 목사 고을을 지켜온 나무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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