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리 1구(도민마을)
세 마을이 합쳐 한 마을을 형성
마을의 동쪽으로는 송림리 송촌마을과 서쪽으로는 금천면 동악리와 경계를 이루고 , 남쪽으로는 봉정마을이 자리하며 북쪽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77가구에 187명이 살고 있는데 모두가 농엡 종사하고 있는 농촌 마을이다.
대학(大學)의 도(道)에서 따 온 마을 이름
도민(道民)이라는 마을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등포면(等浦面) 12개 마을 중 하나인 도민(道民)리로 나온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산포면 신도리 도민마을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이름은 사서삼경(四書三經) 가운데 하나인 대학(大學)의 첫 구절 '大學之道는 在명德하며 在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에서 '大學之道'의 '도(道)'자와 '在新民'에서 '민(民)'자를 따와 도민(道民)이라 지었다고 한다. 한편 이와 달리 마을의 위치가 큰 도로 옆에 자리 잡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므로 도민(道民)동이라 불렀다고도 전한다. 마을을 시도 12호선이 지나가고 있어 수긍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중의 정승 출생지여서 심었다는 감나무가 있는 한새감나무와 마을의 들녘을 이르는 성토골, 고마실, 솟골, 밤갓터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특히 한새감나무는 지명의 사실여부야 어찌 되었든 마을의 깊은 유서를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예전 마을은 모두 세 개의 작은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큰 마을인 도민마을과 완도촌, 샛가지가 그것이다. 완도촌은 완도사람들이 많이 거주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샛가지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특히 샛가지는 아랫샛가지와 윗샛가지로 나뉘어 불렀었다. 이들 마을 간의 생활문화와의 접촉, 그리고 동질성 등은 도민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김해김씨에 의해 마을형성
도민마을은 김해김씨 마을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약 400년전에 김해김씨 원연(元延)이 함평군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이 곳으로 입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해김씨 집성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김해김씨 족보에 따르면, 처음 입향한 것으로 알려진 김해김씨들은 함평군 나산면 원선리 유촌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 유촌마을에서 10여대를 거주하던 김해김씨들이 많은 인물을 배출하자 국가가 그 연유를 알아보게 했고, 선산의 지세가 천하의 명당임을 알게되었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김해김씨들이 나라를 전복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묘들을 파헤치도록 지시했다.
유촌마을의 김해김씨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그 중에서 원연(元延)과 그의 부친 명세(明世)가 공산면 백사리로 피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친이 공산면에서 타계하자 원연이 이곳 도민동으로 입향,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김해김씨가 정착하기 전에 이미 마을은 있었고 사람들 또한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정승을 했다는 남평문씨와 세마공(洗馬公)이라는 해남김씨(海南金氏)가 그 주인공들이다. 두분 모두 이곳이 출생지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특히 해남김씨같은 경우에는 자(字)는 만일(萬鎰)이고 호(號)는 남포(南圃)라는 자호(字號)가 구체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어버이날에 경로잔치 여는 효심 깊은 마을
마을에는 오래된 문화유적은 없다. 그러나 1975년에 만들어진 김해김씨 문중의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입향조인 원연(元延)을 비롯 그의 아들 금배(錦培)와 손자 종기(鍾器)를 모시는 이 곳은 김해김씨를 비롯 주민들의 경건한 강학 장소로 쓰인다. 또한 예전에는 동제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농악대가 마을에 있었으나 이들 또한 현대화에 밀려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 조직으로는 1945년 창립된 위친계가 있다. 모임의 목적은 부모님을 위한 것이며 계원들의 애경사에도 상부상조한다. 또한 매년 어버이날이면 마을의 어른들을 위한 잔치를 열어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마을의 맞은편 능선의 밭으로 개간된 곳에는 삼국시대 것으로 보이는 유물산포지가 있다. 이곳에서는 각종 토기들이 출토된 바 있다.
신도리 3구(호혜원)
꿈과 희망이 가득한 마을
신도 분교를 지나면 신도3구라 쓰여져 있는 자연석으로 된 표지석이 나온다.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가루수가 즐비하게 서 있어 평온한 모습 그대로다. 호혜원 마을은 산포면의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이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봉황면 옥산리가 나온다. 마을이 남단에 위치한 관계로 2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다도면 풍산리가 자리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월산제가 있어 농업 용수를 관장한다. 남쪽으로는 봉황면 옥산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당촌마을이 자리한다.
은혜를 베푸는 동산
마을은 한국전쟁이 끝나 직후 음성나환우(한센병)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평화촌(平和村)' 이라 불리게 된데서 연유한다. 이후 전남 각처를 떠돌던 환우(患友)들이 차츰 이 마을로 정착하게 되고 전남 자립 이상촌을 형성하자는 의미에서 '망월촌(望月村)'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환우들의 수효가 집단화되자 '새벽촌'이라는 마을이 생기게 되고 전남도지부로 변경되기에 이른다. 인구가 늘면서 마지막으로 '희망촌(希望村)'이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호혜원 마을은 현재 평화촌, 망월촌, 새벽촌, 희망촌 등 4개 마을로 구성되었으며 재단법인 '나주 호혜원'으로 인가된 후 농축산단지로 조성되고 있다. 호혜원(互惠園)이라는 이름은 서로 은혜를 베풀자는 의미에서 붙여졌고, 각 마을의 이름은 환우들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내일을 설계를 해보고자 지어졌다. 한편 마을에는 생당골, 턱골, 아샘골 등의 지명이 있는데, 이 세 곳을 합해 '산태미골'이라 부른다. 산태미골은 마을의 지형을 일컬을 때 인용되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이 턱골이라는 곳에서 의령남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한다. 그후 의령남씨들은 당촌으로 이주하여 떠났고, 한동안 허허벌판으로 남아있던 이곳을 한센병 환우들이 정착하여 지금의 마을을 이루었다.
최흥종 목사와 최우식의 만남
음성나환우들의 대부로 불리는 최흥종 목사와의 만남은 마을을 설립하고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최흥종 목사의 헌신적인 후원과 최우식의 노력이 빛을 본 것이다. 먼저 최흥종 목사에 대해 간단히 알아본다. 그는 1880년생으로 1922년과 1927년에 두 번이나 시베리아 선교사로 나갔고, 1919년에는 3.1운동을 광주에서 주도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920년에 광주 YMCA를 창설하고, 1932년엔 <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하여 1933년에 나환자 5백명과 함께 11일 동안 도보로 서울까지 올라가서 총독부에 소록도 나환자 갱생원 설립 약속을 받아낸다. 광복 후에도 줄곧 나환자들을 위해 <한국나예방협회> 창설, 삼애학원, 호혜원, 송등원 등을 설립하는데 기여한다. 1935년에 나환자들과 함께 살기 위해 스스로 자기는 죽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사망통고서를 낸 후 광주 무등산 오방정에 은거하면서 나환우를 위해 살다가 1966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광주시 사회장으로 엄수된 장례식에는 수많은 나환우들과 걸인들이 관을 붙들고 울부짖는 소리로 장례식이 지연되기까지 했다고한다. 이렇듯 음성나환우들을 위해 일생을 보낸 최목사에게 환우들은 기댈 수밖에 없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초반까지 송정리 등지에서 집단 생활을 하며 유리 걸식을 하던 최우식 등 환우들은 최목사를 찾아갔고 수차에 걸쳐 면담을 갖는다. 그리고 광주에서 20여리 떨어지고 이상촌으로 입지적 조건이 좋은 지금의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뒤안에는 최목사와 함께 관계부처를 찾아다니며 노력한 최우식이 있었던 것이다. 최우식은 호혜원이 설립되고 난 뒤에도 오랜 기간 원장을 맡아 마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한다. 목포에서 상업학교를 다녔다는 그는 자신의 병든 몸을 뒤로하고 주민들을 위해 평생을 살다가 71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마을이 형성되고 난 뒤 최초로 입향한 사람은 청주한씨(淸州韓氏) 금선(今善)과 의령남씨(宜寧南氏) 재천(在天)이다. 이들은 1954년 호혜원이 설립되자 이 곳으로 입주하게 되고 기반을 잡게된다. 산포면의 여느 마을과 같이 견실한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호혜원마을. 이제 자신들이 기른 돼지를 기증도 하며 살 정도로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마을의 터를 잡고 발전시킨 최흥종목사와 최우식, 그리고 함께 마을을 이루는데 노력을 했던 조삼봉, 윤재백, 김희겸 등의 봉사정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편 1980년대 기록에는 새벽촌이 새벽 효(曉)자를 써 효촌(曉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동조직체 구성으로 마을의 구심점 만들어
한국전쟁 이후에 형성된 마을이지만 주민들의 아이들에 대한 희망은 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가장 먼저 설립된 곳이 유아원이었다. 1960년 법인 삼성유아원으로 설립된 이곳은 현재 26명이 교육을 맡고 있다. 이외에도 1978년 설립되어 노인들의 쉼터와 놀이터로서 역할을 하는 노인당, 1975년 설립되어 노약자 안식처인 양로원과 1999년 환경정화를 위해 조직된 농축법인 등이 있어 마을 조직체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여기에 후손들이 없거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마을의 노인들은 모두 양로원에 모이게 하여 공동으로 봉양하고 있다.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