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성리 1구 (馬城마을)

산포면의 중심마을

나주에서 광주로 가는 광목간 국도, 비행장으로 건설된 옛 도로 곁에 새로 생긴 도로로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마성(馬城)마을이 나온다. 산포면의 중심마을로 산포면 공공기관의 대부분이 자리한 이곳은 도로변에 위치하며, 들어서는 길 또한 여러 갈래다. 주변에는 주택과 공공건물, 그리고 논과 밭으로 이루어졌다. 논에는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시설하우스들이 보이고 있어 미맥 농사 외에 특용작물을 주된 수입원으로 하고 있는 마을 임을 알려준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평야를 넘어 등수리와 경계를 이루고 , 서쪽으로는 면의 중심마을인 매화마을이 자리한다. 남쪽과 북쪽으로는 온통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마장(馬場)이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

현재 확인된 마을의 입향조는 흥덕장씨(興德張氏) 장정한(張鼎漢)으로 알려진다. 원래 전라북도 고창군에 살던 흥덕장씨들은 인조반정을 피해 나주로 낙향하여 동강면 월통산 아래에서 3대에 걸쳐 거주하다가 분가를 하게 되고 자익(滋翼)의 둘째 아들 정한이 300여년 전 이곳 마성마을에 정착한 것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 후 후손들이 마성을 터전으로 문족적 기반을 삼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흥덕장씨의 나주지역 내 주요 집성촌은 동강면의 장동리와 산포면의 매성리가 된다(매성리 장계환 제보). 흥덕장씨 입촌이후 개성이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등이 뒤이어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흥덕 장씨가 개촌한 것으로 알려진 마을

마을의 최초 입향 성씨는 보성오씨(寶城吳氏)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형성연대는 미상이나 400여년 전에 보성오씨(寶城吳氏) 오한림(吳翰林)이 광산구 동곡면에서 살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어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보성오씨는 마을에 한 가구도 거주하고 있지 않다. 앞서 밝혔듯이 1789년이나 1912년의 기록에 마을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당시 마을 형성이 안되었다기보다는 기록에서 누락된 것으로 보는 것에 더욱 신빙성이 간다. 기록누락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마을의 동쪽에 자리했던 도장촌(都狀村)이라는 마을이 이미 1789년 기록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100여년 전부터 전해돈다는 동계모임 또한 마을의 오랜 역사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 도장촌은 1912년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후 마을로서 그 형태가 차츰 소멸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철비(鐵碑)남아 있고 많은 인물 배출

마을의 문화유적으로는 1920년 11월에 건립된 장진호(張軫湖)의 효자비와 1915년 세워진 청주정씨(청주정씨) 효열행비가 있고. 1980년대 세워진 개성이씨의 효행비도 있다. 특히 청주정씨 효열행비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보기 드문 철비(鐵碑)이다.

매성리 2구 (梅花마을)

마성마을과 함께 산포면의 중심마을

광주 방향으로 국도 1호선을 따라 쌍산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시도(市道) 25선이 나온다. 신도를 따라 100여미터 직진하면 왼쪽으로 형성된 마을이 매화마을이다. 이웃한 마성마을과 함께 산포면의 중심 마을로 자리한 이곳 매화마을은 사방이 확 트여진 평야마을이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같은 면소재지의 하나인 마성마을이 있고 서쪽으로는 넓은 평야와 시설하우스를 넘어 이스물 마을이 있고, 남쪽으로는 신흥마을과 통정마을이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새로 건설된 국도 1호선과 예전부터 건립된 비행장 도로가 보인다(현재의 비상활주로).

매화(梅花)와 관련된 마을 이름

마을의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다. 이 기록에는 두산면(頭山面) 매화리(梅花里)로 나타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포면 매성리에 속한 매화 마을이 되었다.

마을 이름은 마을 형성 당시 우물가에 만발한 매화꽃에서 연유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마을의 노인들 가운데는 매본등과 꿩바탕이라는 지명 때문이라고도 한다. 매본등의 매가 꿩바탕에서 노는 꿩을 잡아먹는 형국이라는데 이와 관련해 꿩을 잡는 매에서 매를 따와 그냥 매화라 부르던 것을 나중에 매화의 매(梅)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들 마을 이름과 관련된 구전 외에도 매화마을은 소의 몸통형국이라고도 하는데 덕례리 건너 구소마을이 소의 머리와 구유형국이라고 한다. 성씨의 구성은 흥덕장씨 14호, 충주박씨 15호, 진주강씨 13호, 김해김씨 11호 등이 거주하고 있다.

광산김씨가 개촌한 마을로 알려진 곳

마을의 입향성씨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전해온다. 어떤 연유로 이 곳에 정착했는지 확실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구전에 1730년경 감찰(監察)벼슬을 가진 광산김씨가 한양에서 들어온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충주박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에 매화가 나오고 있어 이미 조선 후기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유추하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편 마을에는 흥덕장씨가 다수 거주하고 있어 이웃 마성마을에서 이주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는 흥덕장씨들이 정착한 것으로 알려진 마성마을이 개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성씨들이 이 곳으로 이주했고, 또한 1789년 이전에는 두 마을이 마성으로 불리는 한 마을이었으나 조선후기에 들어서 두 마을로 분리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 공출의 아픔 겪었던 곳

조선후기에 형성된 마을인지 주변 마을과 같이 동학이나 한말 의병같은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단지 마을 어르신 말씀의하면 일제 강점기 공출의 아픔을 겪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20대 이상의 청ㆍ장년층은 마을을 피해야 했다.

4기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마을 좌측의 구릉상에 최근까지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묘제인 지석묘 4기가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모두 훼손되었다.

매성리 3구(재성ㆍ 쌍산ㆍ 이시물 마을)

재성(猪城)마을

담장 밖으로 유실수 익어가는 아름다운 농촌마을
매화마을에서 농로를 따라 이시물 마을을 지나면 널찍하게 잘 포장된 도로가 나온다. 이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한참을 가면 재성마을로 들어설 수 있다. 마을의 중앙에 자리한 주민들의 쉼터인 동각, 그 뒤에는 1997년 완공된 새마을 회관과 경로회관을 겸하고 있는 마을 회관이 있다. 뒤편으로 '두산'이라 불리는 야트막한 잔등이 있어 배산의 형세를 지니고 있고 마을의 전면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동남쪽은 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평야의 배수는 마을에 자리한 '재성제'라 불리는 저수지로 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매화마을과 마성마을의 면소재지가 자리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금천면과 경계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호남광산과 이시물마을이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구릉지대와 평야를 거쳐 신흥마을이 자리한다.

조선중기부터 형성된 돼지가 누워있는 명당마을
마을의 이름이 최초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789년 <호구총수>로 남평현 두산면 11개 마을 가운데 재성이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 이미 조선중기에는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또한 남평군 두산면 17개 마을 가운데 한 마을로 기록되어 있어 일제강점기까지도 마을의 형태는 큰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산포면 매성리로 개편되면서 산포면에 속한 '재성'이라는 자연마을로 되었다. 마을 이름은 지세가 돼지가 누워있는 형국이어서 돼지 저(猪)를 써서 붙여졌다고 전한다. 한자 음대로라면 저성이라 불려야하나 마을이 형성된 후 세월이 흐르고 마을 사람들에 편하게 불려지면서 변음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한문으로는 저성(猪城)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마을 뒷산에는 임금님이 승하했을 때 예를 지내는 제단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주민들은 이를 가리켜 '두산'이라 부른다.

김해김씨가 정착한 마을
마을의 형성 연대나 최초의 정착자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 단지 구전에 김해김씨(金海金氏) 영한(永漢)이 인접한 광산군에서 살다가 이곳의 지세가 돼지가 누워있는 형상처럼 특이하고 좋아 보여 이곳을 택해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이와 함께 이미 1789년의 <호구총수>기록에도 마을 이름이 나타나고 있어 1700년대 후반 이전에 마을형성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명당자리만큼이나 평온했던 마을
이 말은 역사가 오랜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격동기에 피해를 입거나 사고 한 번 없었던 평온한 마을이다.

쌍산(雙山)마을

국도1호선과 인접한 교통이 편리한 마을
금천면에서 산포면으로 넘어오는 국도 1호선.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으로 지방도 58호선이 보이고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가옥들이 줄지어 자리를 잡고 있다. 개성이씨 세장산을 등지고 마을 앞으로는 산포천과 나주평야의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마을의 동쪽인 정면으로는 나주평야이고 서쪽으로는 금천면 금곡리와 경계한다. 남쪽으로는 개성이씨 세장산을 등지고 북쪽으로는 국도1호선을 넘어 나주평야를 볼 수 있으니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이다. 전남 서남부 지역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다는 도로와 접하고 있어 주민들은 교통사고에 항상 긴장하며 산다.

쌍둥이산 아래 형성된 마을
마을의 이름이 최초로 보이는 기록은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으로 남평군 두산면의 17개 마을중 한마을인 '쌍산'이 기록되어 있다 .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나주군 산포면 매성리 쌍산이 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쌍산(雙山)이라는 이름은 마을의 형성 당시 남쪽과 북쪽 산의 형태가 쌍둥이 형상의 산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그리고 마을은 두 산의 가운데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마을의 이름은 쌍산이라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그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한편 마을 앞으로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주샘골'이라는 샘이 있었다고 한다. 이 샘은 맑고 시원한 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어 오랜 세월 주민들의 식수로서 또는 빨래터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청주한씨가 개촌한 것으로 구전되는 마을
최초 입향성씨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1912년의 기록에 이 마을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조선후기에는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청주한씨(淸州韓氏) 현철(賢哲)이 산포면 내기리에서 살다가 분가해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경로잔치 여는 우애 깊은 마을
마을 형성 역사가 짧은 탓인지 별다른 문화유적은 없다. 다만 1986년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한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열행(烈行)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열녀각이 있다. 한편 마을에서는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주민들이 마음을 합해 '경로잔치'를 마련, 노인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받고 있다.
현재 확인된 마을의 입향조는 흥덕장씨(興德張氏) 장정한(張鼎漢)으로 알려진다. 원래 전라북도 고창군에 살던 흥덕장씨들은 인조반정을 피해 나주로 낙향하여 동강면 월통산 아래에서 3대에 걸쳐 거주하다가 분가를 하게 되고 자익(滋翼)의 둘째 아들 정한이 300여년 전 이곳 마성마을에 정착한 것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 후 후손들이 마성을 터전으로 문족적 기반을 삼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흥덕장씨의 나주지역 내 주요 집성촌은 동강면의 장동리와 산포면의 매성리가 된다(매성리 장계환 제보). 흥덕장씨 입촌이후 개성이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등이 뒤이어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시물 마을

너른 들판 한 가운데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
매화마을에서 콘크리트로 포장된 옛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300여미터 가면 이시물 마을이 나온다. 마을로 가는 도로의 좌우로 펼쳐진 평야에는 멀리는 남평읍의 건물들이 보일 정도로 아련하다. 동쪽으로는 시도 25선을 넘어 매화마을이, 서쪽으로 쌍산마을을 넘어 금천면과 경계하고 남북으로는 온통 들녘이다.

농사짓기 편한 곳이어서 마을을 형성
이시물이라는 마을의 이름은 가운데 있었던 우물에서 유래된다. 마을이 형성될 다시 들 가운데 있었던 이 우물은 생수가 잘 나왔다고 한다. 이 물에 반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 살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이 우물은 1968년에 경지정리사업으로 인해 매몰되었으며 우물자리는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고 있고 헛시암(샘)만이 남아있다. 한편 이 마을을 '노(鷺)등'이라고도 부른다. 온통 논으로 펼쳐진 지역인지라 개구리와 미꾸라지를 잡아 먹으려는 해오라기들이 날아들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이 마을은 마을의 형성이 오래된 곳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김해김씨 찬현(贊鉉)이 영광에서 살다가 들이 좋고 농사짓기 편리한 이곳에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매성리 4구 (新興마을)

개척정신이 살아있는 마을

시도 10호선을 타고 신흥마을로 가는 길, 도로가 좌우에는 다른 마을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가이스가 향나무를 재배하는 곳과 나주를 상징하는 배나무 과수원, 그리고 가끔 눈에 띄는 복숭아 과수원 등 벼를 재배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에 멀리서 들려오는 참새떼를 쫓는 총포소리의 굉음은 이 마을만의 특성일 성 싶다.

가옥들이 듬성듬성 밭 가운데 있어 마을을 이루지 않고 있는데 밭은 개간하기 위해 마을이 형성되다 보니 이런 모양을 갖추게 된 것 같다. 마을은 매성리에서 가장 남쪽이지만 가장 높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산포면의 너른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송림리 통정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시도 10호선이 통과하며 금천면 동악리와 면계를 이룬다. 남쪽으로는 신도리 완도촌과 도민동이 있고 북으로는 면소재지가 내려다 보인다.

새로이 밭을 개간해 만들어진 마을

신흥마을은 원래 새밭등이라 불리던 곳이다. 울창한 산림으로 이루어진 이 곳을 밭으로 개간하기 위해서 하나 둘 농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 뒤 마을이 형성되어 하나의 자연마을이 된 것이다. 마을의 이름 또한 새로이 밭을 개간한 등성이라는 뜻이다. 그 후 마을의 이름은 지금의 신흥으로 바뀌게 된다. 이 또한 새로이 흥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하지만 1789년 <호구총수>나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의 기록에 새밭등이나 신흥의 어느 것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마을이 1912년 이후에 세워졌거나 기록에 누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 개간을 위해 처음 정착했던 사람은 전주이씨 동진(童珍)으로 알려진다. 그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곡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언제 이곳으로 왔는지는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