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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째이야기 동래성 전투 전라도 정읍태생의 동래부사 송상현은 3만명의 왜군들이 동래성을. 포위하기전에 이미 관민을 성안으로 불러들여 부산진성의 패인은 조총공격이었음을 알고 조총공격을. 막기위해 가시덩굴로 울타리를 치는등 방패를 마련하는. 치밀한. 방어작전을 편다 싸우다 죽는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는것은 어렵다며 아전과군노 여종할것없이 송상현을따르겠다고맹세하며 나라와 중생들로부터 받은은혜 즉 시은을. 갚는길이라며 싸우는데 주장인 병사 이각과좌수사 박홍은 후퇴하거나 수군을 이끌고 가버린다 끝내 송상현은 순절하고 동래성은 왜군에 함락되고 만다 어려움에 처했을때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고 줄행랑치는 장수들, 그들이 패인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멋지게 싸우다 순절한 송상현동래부사님 감사합니다
동래성 전투와 다대진성 전투는 거의 같은 시간에 시작되어 거의 비슷한 시간에 끝났다.물론 아군의 패배였고 동래부사 송상현과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다.두 사람은 최선을 다하였으나 중과부적에다 무기의 열세로 어쩔 수없는 패전이었다.전라도 정읍 태생의 송상현은 문관 출신이지만 무관 못지 않은 지략과 용맹을 가지고 있었다.동래인근 지원군에다 승병까지 합쳐 삼천여 명과 양민 일만 칠천 명까지 더하면 이만여 명.반면에 고니시가 지휘하는 왜군은 정예 군졸만 삼만여 명. 그러니 양민을 제하면 십대일의 싸움으로 처음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다대진도 아군이 천 명이고 왜군은 이천 명으로 이대 일의 절대 열세였다.그리고 무기면에서 활과 총의 대결은 처음부터 불공정한 게임이었다.조총은 날이 어둡다거나 원거리에서는 활이나 총통에 미치지 못하지만,맑은 날 근거리에서는 조준사격이 가능하므로 성능면에서 월등했다.왜군들은 첫 전투에서의 패배를 교훈 삼아 안개가 다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 공격을 개시했다.거기다 지원나온 경상좌병영 병사 이각은 본성(울산)을 지켜야 한다며 돌아가버렸고경상좌수사 박홍의 수군은 동래로 오다가 겁먹고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붉은 조복을 입고 끝가지 싸우다 전사한 송상현과 두 형제가 손을 꼭잡고 전사한 윤흥신.왜군들도 감동하여 송상현의 가묘를 써주고 윤흥신 형제는 고양까지 시체를 옮겨 주었다고 한다.여기까지는 조선 관군 지휘관들이 잘만 했다면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마치 작년에 일본에서 반도체 핵심부품 세 가지를 갑자기 수출 금지하였지만우리 기업과 국민들이 똘돌뭉쳐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삼아버렸던 것을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으련만.부산진 첨사 정발, 다대진 첨사 윤흥신, 동래부사 송상현을 존경하며 후손들의 번성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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