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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주 영산강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극렴당에서의 이별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정치속의 암투. 선조22년10월에 터진기축옥사 동인과 서인이. 맞부딪친 비극의 발화점 정여립은 관군에 쫓겨 자살하였으나 한양에서 능지처참형 전라도 동인들이 대부분 비명에간 기축옥사 동인이나 서인이나 목숨은 같은것이고 한임금을 보필하는 신하인데라고 말하는 김천일의 말에서 많은생각들이 교차한다 3편 잘읽었습니다^~^
3회에서는 나주를 떠나는 민인백과 김천일이 극념당에서 나눈 <이별주>를 주제로 한다. 선조 때 동인당과 서인당이 출현하고 공식화 되기 시작했던 붕당을 배경으로한 역사적 사건 기축옥사를 얘기한다.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당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으로 박해를 받았던 사건이다. 기축옥사 하면 호남의 궁벽한 땅에서 38세에 사사된 정암 조광조와 그의 죽음 앞에 통곡한 32세의 학포 양팽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붕당을 지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된 정암과 한 도학자의 죽음을 지키고 주검을 수습한 학포.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던 그들의 역사적 삶이 작금의 정치 현실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었다. 4회를 기대한다.
나주 목사로 부임한지 3개월 여 만에 떠나는 민인백과의 이별주.그러나 이별주는 기축옥사(己丑獄事)의 깊은 내막에 대한 이야기로 흐르고 만다.그 누구보다 전라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김천일로서는 소위 정여립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로 인하여 전라도 출신 선비들이 너무도 많이 희생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당연하였으리라.더군다나 사돈이자 소년기 친구이던 우의정 정철이 그 사건을 담당하였으니 남의 일 갔지가 않았을 것이고.따라서 당시 진안현감이었던 민인백에게 진실을 물어본 것이다.다행이 민인백은 정철을 스승처럼 생각하고 있고 전라도 출신이 아닌 사람.거기다 그 사건 당시 진안현감으로 있었으니 자초지종을 객관적으로 말해주리라 판단하였던 것 같다.하기사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천 여명이나 처형당하였으니 경천동지할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선조 임금 당시 선비 천 명이면 지금의 지식인 만명, 아니 십만 명쯤 되지 않을까?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자는 그 가족까지 가차없이 처형하였던 정철.김천일은 민인백에게 정철을 만나거든 전라도 사람들 그만 좀 죽이라고 부탁하더라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한다.동인들에겐 저승사자 같던 정철이 사돈이자 친구라고 하더라도 좀처럼 하기 어려운 부탁이었으리라.위험을 무릅쓰고 편지가 아닌 구두로 부탁을 한 김천일의 애향심을 엿볼 수 있다.아울러 그같은 애향심이 있었기에 전라도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데에 목숨을 바쳤으리라 짐작해 본다.
나주 목사 민인배과 건재 김천일이 깊은 속마음을 얘기한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천하의 인재를 등용한다는 포고를 하고 사림에서 학문에 깊이가 깊은 사림을 등용한다. 세조때 공을 세운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에서 4대 사화를 겪은 사림파가 몰락한 후 다시 선조로 인해 중앙에 진출하지만 , 정능부근에 사는 동인과 청운동 부근에 사는 서인으로 갈라져 분당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 시대적 배경을 뒤로 하고 임란 전 최대의 비극인 기축사화에 대해 김천일과 나주 목사를 하고 떠나는 민인백과 이 사화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 정철과 이이 성혼 등 당시의 유명한 선조들이 등장한다. 기축옥사에 대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문인으로 의병장이 된 김천일의 초로의 나이에 일어난 정세와 그가 가졌던 인생관과 도덕관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덕성스런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자신을 던져 나라를 구한 그에게 인품역시 좋은 선비였음을 보여준다. 나주 사람은 참 좋겠다. 이런 훌륭한 인품의 선조가 자기의 고향 사람이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겠다고 생각된다. 주 일회는 좀 짧지 않나 생각될 정도로 내용이 재미있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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